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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Feb 04. 2019

처가월드 싫은 이유를 물었다

처가에서 일박 못할 이유를 오레오맵 방식으로 기술해보기

저,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있어요. 처갓집이 있는 방향으로 절이라도 하려던 남편이 올해 구정에 이상해요. 친정부모님이 아실까 걱정돼요. 장인어른 입에 혀 같은 존재가 18년 넘으니 정이 떨어졌나 봐요. 그리고 무슨 불만이 있는 거 아닐까요? 지난번 시골집 옹벽을 쌓는다고 부르시고 장롱을 옮긴다고 사위를 자꾸 불러 마음에 생채기가 났을까요? 저의 친정 부모님이 너무 심하신가 누구를 붙들고 물어보고 싶어요. 이번 설을 맞아 며칠 전부터 일박을 하지 말자고 했더랬죠. 이유를 말하지 않고 DDONG 마려운 dog처럼 자꾸 제 주위를 어슬렁 거리며 툭툭 던져요. 이번 설에 몇 시에 출발할 거냐, 얼마나 있다 올 거냐, 일박을 왜 하느냐는 질문을 드문드문 던지는 거였죠. 남편의 질문의 의중에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아주 해맑게 되받아치기를 며칠 그랬어요.



"일박! 왜? 자고 오기 싫어?"

"아니"

"그런데 왜 자꾸 따라다니면서 똑같은 질문을 해? 나 같은 말 여러 번 하는 거 딱 질색인데"

"그냥 궁금해서"


여기까지는 좋았죠. 이 글을 쓰기 한 시간 전까지는 말이예요. 그러고 다시 이전에 했던 말을 진지하게 했어요.


"일박하지 말고 새벽이라도 돌아오자"

"왜, 일박을 못하겠다는 이유가 있어?"


그분은 뜸을 들였어요. 속에 천불 나는 거 알죠?  내가 처가에 안 가려고 한다고 마치 늘 화를 낸 것처럼 우물쭈물거렸어요. 내가 교양 하나로 살아온 여자거든요.


"다음날 수요일이라 준비해야 할 게 있고, 더 중요한 약속이 생겼어. 작은 누님이 오랜만에 오신대. 그래서 고기를 구워 먹자고 연락이 와서"

"그런 이유로 일박을 안 하려는 것은 다음날 오전 시간이라도 쓰겠다는 거야? 누님 만나고 고기 먹고 짧은 시간에 중요한 일처리 하면 안 돼?"

"안돼.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유는 거기 너무 추워"

.

.

.

"인정!"

.

.

.

가장 중요하지 않는 어설픈 이유가 가장 설득력이 있었어요. 지난번 아이들 인생 최초로 귀농한 지 얼마 안 된 외갓집에 가서 2박 3일 있다가 심한 감기에 걸려 돌아와 2주를 고생한 기억과 연결된 거죠. 그 기억 덕에 우리의 의논은 바로 종착지에 다 달았어요. 당일 밤에 출발해서 새벽에 도착하기로 결정했어요. 싱거운 사건이죠? 비밀은 무슨 비밀요.



오레오 맵으로 남편의 의견 정리하기


남편의 제안이 그리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나의 감성을 건드려 합의가 되었다. 처음 말한 비밀은 별로 비밀일 것도 아닌 시시한 내용이었다. 남편은 다른 의도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예민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전 같으면 남편의 발언의 의도를 혼자 추측해서 기분이 나빠지거나 남편과 언성이 조금 올라가며 의논했을 문제다. 그런데 춥다는 이유로 서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시도를 하나 덧붙였다. 최근 읽은 글쓰기 관련 책에 언급된 오레오 기법이 생각났다. 양치를 하면서 신나게 읊었다. 주장+이유+근거+주장을 반복 혹은 제안-이와 같은 순차적 틀에 남편의 주장을 넣어 정리해보았다. 읽었던 책을 적용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남편에게 이렇게 주장하면 더 선명하지 않냐고 혼자 떠들었다.


1> 주장

당신은 오늘 밤 10시를 기해, 이틀 후 가게 될 처갓집 방문의 계획을 1박 2일에서 당일치기로 전환하자고 주장했어.


2> 이유

"당신은 그 이유로 다음날 처리해야 할 가중된 개인 업무를 오전 중 처리해야 한다는 것과 다음날 중요한 약속 하나 가 스케줄에 더해져서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를 말했어

맞지?"


3> 근거

"당신은 오전에 처리하지 않으면 저녁에 닥친 과업을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말했어. 그리고 정말 오래 만나지 못한 둘째 누님을 만난다는 것이 가족사에서 매우 중요하여 거기에 전념하고 싶다는 것을 근거로 말했고

맞지?

마지막으로 당신은 내가 필할 수 없는 근거를 하나 덧붙였는데 그것이 나의 감성을 가격할 만큼 공격력이 큰 근거였어. 거긴 시골이고 매우 춥기로 유명한 곳이지. 경험상 등은 뜨겁고 코는 시린 현상을 겪을 게 뻔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몸의 컨디션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새벽 귀가를 주장했어"


4> 주장의 반복 및 제안

"마지막으로 앞의 세 가지 이유와 그 근본 근거 여러 개로 우리의 일박이일 처갓집 방문을 당일 귀가하자는 주장과 다음에 일 있으실 때마다 들러 도와주겠다는 암묵적 대안까지 주장한 거 맞지?"


세안을 마치고 나오는데 남편은 코를 골고 잠이 들어 있었다. 뚜둥~


남편이 나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않고 벌써 잠들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다시 화가 나려고 했지만, 오레오맵으로 정리한 것에 속이 시원해져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  빈약했지만  남편의 주장과 이유, 그 근거로 나는 설득당했고 그의 주장은 먹혔다.


 남편은 진실로 건전한 위의 이유에서 일박을 반대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싫은 걸까? 많은 며느리들이 '시월드'의 '시'자만 들어가도 고개를 가로젓는 마음과 같은 것 아닐까? 만약 잠든 남편의 마음이 내편이 아닌 남편이라도 별수 없다. 마음이란 개인의 것이니까.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존중하고 싶다. 언젠가 이 비밀을 풀고야 말겠다는 야무진 결심과 함께 내일 까치설을 잘 보내자고 모든 이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설을 앞둔 많은 며늘님들과 사위님들의 건투를 빌며

살아서 만나요
.
.
시댁에서 일박 안 해요. 당일 귀가해요.
저, 이런 며느리예요.
시댁이 5분 거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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