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애 Mar 30. 2019

중증 착각증후군 아시나요?

오늘 또 착각했다.

오늘 말릴 수 없는 중증 착각 증후군이 재발했다.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어 코레일 회원인 남편에게 예매를 부탁했다.

교통비를 허투루 쓰지 않을 작정에 상행길은 새마을로 하행선은 ktx로 부탁했다. 몇 푼 아낀다고 그러냐는 타박에 결코 택시비도 쓰지 않을 결심을 내비쳤다.


시간이 돈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토요일 여유 있는 시간에 시간을 활용하고 싶었다. 애들 떠들까 조바심 내지  않고 혼자 다녀오는 이런 외출은 평생 처음이라 설렘이 폭발했다. 욕심 많게도 책을 두권이나 손에 들고 출발했다. 부탁만 하면 배웅해줄 남편이겠지만(속마음은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시간 안에 알뜰하게 다녀와보고 싶었다. 기차표도 아낀 마당에 역까지 가는 길 택시를 타는 게 어불성설이라 지하철을 이용했다.


일단 상행 노선은 아주 깔끔하게 성공적 탑승을 했고 일도 잘 마무리했다. 조금 불만이 있다면 붐빌까, 좌석이 없을까 걱정스러워 미리 예매한 것이 약간의 문제긴 했다. 상하행 모두 1호차에 1~3번 좌석이었다. 처음에 빨리 예배해준 정성에 공주병이 발동해서 기분이 좋았고 현장에 가보니 플랫폼 제일 끝으로 걸어야 하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관심과 사랑이라 착각해 좋아진 기분을 현실과 맞바꿀 필요는 없어 일찍 예매해준 정성만 생각했다.

기차안에서 바라본 한강, 시골서 왔시유~
이런 하늘이 1시간후 돌풍과 눈발로 시야를 가렸어요



하행길에서 나의 착각병이 도졌다. 이번에도 1호다. 이미 상행길에 플래폼 끝이라 불편했고 종일 걸어 화가 더해졌다. 성질을 부리고 싶어 졌다.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폭설이 내렸다. 45°로 내리꽂는 진눈깨비와 돌풍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서울역 플랫폼은 냉동창고처럼 추운 바람이 감돌아 견디기 어려웠다. 과하게 높은굽이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다


냉큼 아무 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갔다. 8호차 사이 입구로 기억한다. 장장 15개의 문을 열고 7량의 칸을 지나야했다. 화가 차서 입이 근질거렸고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쇼윈도 슈퍼에고에 지배당하고 교육의 힘에 갇힌 전근대적 중년 아줌마로 교양인의 말만 간신히 되뇌었다. "7호차네, 음 아직이네" 여기까지 암울했다. 그리고 곧 봄날이 왔다.


4호나 3호 차량 문을 열고 ktx에 특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좌석이 3개고 널따란 1인의 공간 뒤편에 넓은 공용 여유공간까지 구비되었다. 좌석도 고급진 회색 융 재질이었다. 나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었다. 나에게 불만을 터지게 했던 1호 차량이 나의 고귀함을 증명할 높은 성 같았다. 입성하는 나는 남편의 특별한 배려로 드레스를 사뿐히 잡고 사뿐 거리는 공주 그 자체였다. 늘어난 짐이 무겁기만 하다가 드레스 끝자락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양쪽 가방 새끼손가락으로 들고 날듯이 2호 차량을 지날 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미리 알리지 않고 일부러 특실을 잡다니, 것도 1호차로 말이지. 이거 완전 이벤트인데? 대박!" 지금까지 18년 동안 섭섭하던 기억은 사라지고 좋은 기억만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몇 번 후회한 기억을 소환해 회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푼 생각에 가볍게 1호기 문을 열고 곧, 플랫폼의  찬바람 때문에 아무 구멍에라도 몸을 쑤셔 넣던 몇 분 전과 오버랩된 줄 알았다. 고개를 젓고 자세히 보았다. 일반 좌석 칸이었다. 죄 없는 남편을 원망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객차 열을 구성한 코레일에 뭐라도 부정의 리뷰를 남기고 싶어 졌다. 진심 남길지도 모른다.


7개의 칸을 지나왔고 무수히 많은 문을 열었건만, 남은 1호기 한 칸의 입구에서 맞은편 복도 끝까지 가는 그 길이 가장 퀴퀴하고 멀게 보였다. 무어라고 진땀이 났다.

겨우 자리에 도착해 정방향으로 앉았다.



다시 한번 오늘 여행에서 이상한 객차 배열로 남편을 향한 따듯한 기억만 남게 도와주신 코레일에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덕분에 바닥과 산꼭대기 다 다녀온 다채로운 기분을 경험했네요. 뜻 없이 객관적으로 표를 끊어준 남편님에게도 무한 감사드립니다. 다음엔 특실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귀띔해주길 바랍니다.

도착했습니다. 설렘을 누리고 착각을 일삼던 여행에서



뭐 어쩌겠어요.  병! 착각병이 도져 그런다 생각하고 말 거랍니다. 가끔이러는거 정상 아닌가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뭐라도 된 줄 착각하는 병 자주 앓고 살죠뭐. 참 다이내믹하니 빨리 늙진 않겠죠?

작가의 이전글 벚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