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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un 21. 2019

즐거움 발견을 위한 독서훈련.

너도 보석을 발견할꺼야

노랑머리 남학생이 들어왔다. 부산스럽지 않았다. 곱게 빗어 흐트러짐 없는 헤어스타일이 땀에 절어 흐트러진 여느 남학생들과는 달랐다. 불가능에 가까운 단정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순응적으로 살아온 아이인지 천성이 그러한지 구별할 수 없었고 아이의 태도와 노란머리의 부조화에 잠시 주춤했다.


몇 개의 학원을 쳐내고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공방에 왔단다. 엄마의 선택으로 온 것이다. 학원 책상 의자 없는 호젓한 이곳이 이상했는지 소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살폈다. 오늘의 목적을 부모님에게 분명히 지시받고 왔는지 나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두 손을 곱게 모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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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쉬어!


라는 눈치였다. 몇 초 후 나를 쳐다보았다. 쉬는 거 말고 뭘 해야지 않냐는 질문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종일 학원 다니느라 힘들었지? 일단 걸어오는데 5분 걸렸으니, 5분 쉬면서 공방 안을 살펴. 물 한잔 마시고.


아이는 나의 지령에 웃기만 할 뿐 행동하지 않았다.


**야, 싫어? 싫으면 네 의견을 말해봐. 말 안 하면 네 생각을 알 수 없어. 의문이 생기고 이건 아니다 싶은데 가만히 있는 거 정말 아니다.


아이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 다른 분위기에 경직된 어깨가 풀렸다. 아이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묵한 아이라는 사전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입이 열리게 하려 여러 가지 말을 주고받았다.


여기는, 너를 괴롭히는 동생도 없어.(이 말에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시끄러운 티브이 소리도 없고 노란 조명으로 집중도 잘돼. 편한 마음으로 책 한 권 읽는 게 목표니까, 이제 시작해보자.


그러고 아이는 책을 펼쳤고 나는 나의 책상에서 책을 읽으며 아이의 독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한 일이라곤 음악의 볼륨을 조절해주거나 에어컨을 켜주는 일이었다.


아이와 첫 만남이 달콤하게 기억되려 10분마다 사탕, 초콜릿, 그리고 오늘 공수해온 옛날 감성 전지분유를 따듯하게 태워줬다. 사탕 깨무는 소리도 초콜릿 봉지를 뜯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뜨겁게 태운 전지분유를 호로록 들이키는 소리도 없었다.


한 시간이 다 지날 무렵 아이에게 한마디 했다.

독서는 공부 잘하기 위해 하는 게 아냐. 결과로 공부를 잘할 수도 있다는 거지. 독서는 즐거워서 빠져들어야 하는 거란다. 네 인생 책을 만나야 해. 이렇게 조용히 읽어나가다 보면 너를 흔드는 책을 만나고야 말 꺼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지 말기를. 앞으로 즐겁게 독서에 빠져보고 싶으면 압으로 다니도록 허락할께. 알겠지?


여기서 독서하면 최고 장점은 "엄마의 감시를 느끼지 않는다는 거야'

어때 좋지?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아이는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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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엄마의 부재일까? 무계획적 방치가 아니라 아이를 개별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다. 학습방법도 부모의 노선과 아이의 원함 사이에 중간 즈음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를 찾고 있는 중이라 부모의 노선에 순종해야 한다는 도덕과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 사이에 싸우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양 쪽의 중간지대에 공방이 있는 게 아닐까. 부모의 욕구와 아이의 의문 사이에서 조정하는 역할. 독서, 글쓰기라는 영역을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즐겁게 체험하도록 이끄게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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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가는 뒤에서 한마디 더 붙였다.


집에 가서 엄마랑 의논하고 다닐지 말지 결정해도 된다. 부모님에게 네 생각을 말하는 게 오늘의 숙제다.


내일 분명히 다시 올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마음이었다. 내일 아이가 다시 오면 내가 할 일은 아이를 환대하는 것. 책을 건네주고 전지분유 한잔 뜨근하게 태워주는 일뿐이다. 감동, 공감, 분노, 긴장, 책에서 무수한 선물을 받을 아이를 기다려주는 것. 아이는 그 선물을 보석처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귀신같은 능력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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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귀퉁이에 작업실겸 공방을 운영중입니다. 대회용 글쓰기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공부력을 올리는 독서를 지도하지 않습니다.


제가 헤매는 글이란 세계를 함께 헤맬 아이들에서 어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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