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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ul 21. 2019

나의 별에 유칼립투스

어린 왕자에게 장미처럼

이른 새벽, 비바람 소리깨니 기분이 좋았다. 태풍의 북상에 걱정스러웠지만 며칠 동안의 끈적거림이 씻기는 것 같았다. 개운한 마음과 달리 몸상태는 달랐다. 어젯밤. 미풍에도 춥더니 올 것이 오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눈이 부어 무거웠다. 오늘따라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 소파에 오래 누워 있었다.


비바람 소리가 조금 잦아들고 거실이 고요해졌다. 꺼지는 몸 때문에 하릴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마음이 널브러진 몸을 괴롭혔다. 할 일이 태산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습관을 마른빨래처럼 접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것도 좋겠다고.

할 일이 태산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습관을 마른빨래처럼 접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것도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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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캠프 특강이 잡혀 늦게 잠을 청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다루지 않던 주제를 준비하느라 애를 썼다. 구두로 전달하기 아쉬워 ppt와 워크시트를 마인드맵 형태로 준비했다. 평소 배우려던 프로그램을 활용하겠다는 목표가 너무 비장했다.


특강은 무사히 마쳤다. 너무 많은 것을 전달하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청자의 입장에서는 쉽고 단순하면 되는 것을 주제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전달하려니 시간이 부족했다. 정작 중요한 부분, 실용적인 뒷 파트는 짧게 훑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준비를 많이 했고 가장 아쉬움이 큰 강의였다.


얼마나 애를 썼던지 돌아온 후 기운이 빠졌다. 멍 때리기 두 시간. 몸은 마음을 반영하는지 미풍에도 여기저기 쑤시는 게 낯설었다. 늦은 밤이 되도록 복잡한 감정에 의미 없이 예능프로를 멍하니 보았다.


피곤과 몸살 기운에 무기력한 아침 마냥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다가와 작은 아이가 외출해야 했다. 나도 공방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몸이 천근만근. 큰아이의 손을 빌렸다. 이럴 때 첫딸이 재산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보들보들하면서 적당히 기름진 적당한 계란 프라이를 대령하고 그녀는 친구를 만나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고, 이어 작은 아이도 외출했다. 나만 남은 마음이 조금 전 무기력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더 스산해졌다. 비바람 소리조차 더 거칠어졌다.


무거운 발걸음 뚜벅뚜벅 현관을 나섰다. 남겨진 공간의 허기가 달려들 것만 같아 작은 보조등을 켜 두었다. 우산 하나 펼쳐 후드득 비를 맞았다. 비의 두드림이  말소리 같았다. 우산에 노크하는 소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무기력해도  괜찮다'며 위로해 주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식은 커피를 허겁지겁 마시듯 혼자 끙끙댔구나.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데 식은 커피를 허겁지겁 마시듯 혼자 끙끙댔구나.

강의는 죽을 쒔지만 하고 싶은 말은 했고 중요한 것은 반복했다.  하루치 강의를 축약해 2시간에 그리 했으면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다음에 강의를 잘할 방법이 생각하며 공방에 도착했다. 청명한 빗소리에 문을 활짝 열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 잘할 것이라 너무 기대했던 것이 문제였다. 커피 한잔 들고 어슬렁 거리다 공방 입구에 비를 맞던 유칼립투스를 보았다.


두 달 전 유칼립투스를 공방에 모셔왔다.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이라 상태를 기대하지 않았다. 원예 지식도 약한 터라 겉흙이 마르면 물을 주길 몇 주, 위쪽부터 난 잎이 마르기 시작했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양이 작년에 샀던 실한 유칼립투스의 고사상태 시작과 흡사했다. 곧 죽을 것 같아 현관 밖에 꺼내 두었다.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이파리 속 새순이 나오는 것을 발견한 어느 날 "유레카"라고 외쳤다.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이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새 생명에 아주 기뻤다. 밖에 버려두자 살아난 이유 아마 통풍 때문이리라. 나의 이전 경험으로 이번 유칼립투스도 말라죽을까 했더니 기우였다.


이후 몇 주 동안 새까맣게 마른 잎은 떨어지고 그 속에서 작은 순이 격렬하게 나왔다. 죽음의 위기를 통과한 식물의 의지. 실패와 어려움이라는 터널을 유유히 통과한 자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강의의 주제가 다양해질수록 나는 넓어지고 깊어진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 고민하게 되고 더 단단해지겠지. 그 길을 가면서 도전만 실패할지도 모른다.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시도해본 적이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생각났다. 나의 실패 경험은 나의 도전 때문에 얻었다. 앞으로 만날 많은 실패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유칼립투스를 사진에 담으며 가지를 쓰다듬었다. '유칼립투스 네가 뭐라고'. 가냘픈 가지에 이파리 몇 달린 식물이 뭐라고 그 견딤과 도전이 대견해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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