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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Aug 01. 2019

언니네 묻지마 여름휴가#1

집순이 무계획 휴가

어떤 휴가가 좋은 휴가일까? 좋은 휴가를 보내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지금 우리 가족이 보내는 휴가과연 좋은 휴가인가. 그리고 휴가기간 어떤 유익이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1과 #2...로 나누어 기록해 보려 한다. 가볍게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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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주부로 있을 때 휴가란 일상과 별 차이가 없는 기간이었다. 출강하며 살 때에는 기관 휴가기간이 나의 휴가였고 아이들과 일정이 안 맞으면 그마저도 휴가답지 않았었다.


공방을 오픈하고 정말 잘 맞아떨어진 휴가를 처음 겪게 되었다. 아이들 학원, 학교와 공방, 남편의 모든 일정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간이라니.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표 아닌가. 결혼 후 처음으로 휴가 전날 설렘으로 잠을 설쳤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남다른 휴가기간에 설렘까지 폭발할 정도라면 치밀한 휴가 계획 정도는 세워야 정상 아닐까. 이렇게 사박자가 맞는 멋진 기회에 휴가 계획이 고작 '무계획'이었다. 부산행, 캠핑카 렌트를 몇 달 전부터 의논했지만 두 주 전에 무산되었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서 귀찮아해서이다. 최고의 기간을 무계획으로 각자 놀겠다는 가족이라니. 각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되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각자 노터치 자유시간 휴가로 정하니  멋짐 폭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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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늦잠을 잤다. 늘어지게 잤고 쑤시듯 허리가 아팠다. 평소 자던 수면 패턴이 깨져서인지 두배 이상 잠을 잤는데 개운하지 않았다. 오래 자면 몸이 건강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너무 적게 자서 골골거린다는 확신이 깨졌다. 생각의 오류를 하나 벗으니 가벼워졌다. 오후 시간 작은아이가 수영을 지켜봤다. 하루가 뚝딱 지나갔다.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렀고 그야말로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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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늦잠을 예상한 늦은 취침으로 불쾌하지 않은 늦잠을 잤다. 그리고 바로 작은 아이의 수영을 따라갔고 함께 모인 공동체 식구들의 점심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영화를 보고 엄마들은 공부를 하는 모임에 나는 일원이 아니었다.


공부를 마치면 점심식사가 늦어질까 봐 빠른 속도로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했다. 시간을 맞추려 세 개의 화구를 다 사용했다. 성인용 찌개, 아이들용 대용량 카레, 아이들용 사이드 국, 그리고 같은 시간 쌀을 씻어 밥을 했다. 계획에 없었던 자발적 요리로 나에게 함몰된 뻔한 시간 사용의 구덩이 하나를 건넜다. 하루가 다시 뚝딱 지나갔다. 밤이 되었고 연초 목표 한 책을 위한 글을 몇 꼭지 썼다. 목표를 세우고 초고를 쓰려니 여간 어깨 힘을 뺄 수 없어 답보상태였는데, 헐렁한 시간 마음이 편해 쉽게 초고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먼 길일 것 같던 글쓰기가 뚝딱 쉬워졌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선물로 받았다.


남편은 통구이 치킨 한 봉지를 들고 축구장 앞에서 소년 같은 미소를 띤 셀카를 보내왔다.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웠을까, 평소 잔소리를 접고 맘껏 즐기시라 축복의 말을 전했다. 당신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기분이 오랜만이었다. 눈치 보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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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이다. 큰아이가 친구들과 놀이공원을 간다고 아침이 부산했다. 남편이 아이를 배웅하고 자유의 길로 떠났다. 작은아이는 오늘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배가 살살 아프다는 이유였다. 이틀 풀로 수영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아이는 나에게 원 없이 공방에서 글을 쓰라고 했다. 사춘기 초입의 아이가 천사처럼 보였다. 무료 애니메이션 무한정 시청으로 노터치, 아이의 배가 씻은 듯이 나았다. 오전에는 집 앞에 있는 카페 공간을 홀로 사용했다. 방학이고 휴가철이라 사람이 없었다. 사장님에게 미안했지만 초집중의 시간. 몇 꼭지 글을 썼다. 몇 개의 펼쳐둔 책을 한 챕터씩 읽었다. 작은아이의 호출에 아이스크림을 배달해주니 아이는 해사하게 웃었다. 더 오래 시간을 보내란 약속과 함께.


계속된 무계획이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손에 걸리는 대로 책을 뒤적거리다가 드로잉북을 꺼냈다. 오늘 하루 먹은 차와 커피로 빈 잔 몇 개가 쌓였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잔을 비우며 무엇을 쌓고 있을까라는 멜랑꼴리 한 생각에 스케치를 했다. 수채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 평생 부러웠다. 연필선을 끄적이다 내려놓았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대로 옮기는 것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 그리고 해보고 싶지만 내 일이 아닌 것이 명확해졌다. 단 십여 분 만에 나와 맞지 않는 일 하나를 분명하게 정리했다. 속이 후련했다. 미련은 계속 가지고 있다고 길이 열리지 않는다. 오늘 미련을 버렸다. 잘했다.

저녁에는 돈 공부 관련 영상과 자기 계발 관련 영상을 보았다. 너무 무지한 소비지출에 머물렀고 시간이 요구하는대로 흘러 다녔다는 반성을 했다. 몇 개의 작은 실천을 결심했다. 카드를 줄이고 통장을 늘리기로 했다. 늘 텅 빈 잔고에 앓는 소리를 하지 않으리라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매일 두 꼭지 이상의 글을 쓰기 위해 시간을 정할 목표도 세웠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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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인 일상, 쳐내야 할 업무, 만나는 사람, 돌볼 가족, 돌고도는 가사로 꺼내보지도 못하던 연초 책쓰기 계획에 물꼬가 트였다. 느슨하니 생각이 더 활성화되는 게 무계획이 가져온 선물 아닐까. 그저 고맙기만 하다.


막히는 고속도로, 휴가지의 불쾌한 바가지요금, 캠핑장에 넘치는 쓰레기 더미, 시끄러운 주차분쟁, 북적이는 사람들, 찌는 폭염의 날씨에 지치지 않아도 되는 묻지마 휴가의 묘미. 중요하나 정작 바빠서 꺼내지 못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과중한 부담이 없으니 문제를 매듭짓거나 풀기에도 수월하다. 그래서 참 좋은 휴가. 어딘가 가야만 한다는 부담백배 휴가가 아닌 머무는 휴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남은 휴가도 과연 그럴까?


남은 묻지마휴가 며칠을 정리해서 #2로 올려야겠다. 기특한 친구를 조금 더 소개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https://brunch.co.kr/@zzolmarkb6sm/431


언니네 시리즈 궁금하신가요?

https://brunch.co.kr/@zzolmarkb6sm/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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