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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Dec 19. 2018

초보시인 출간 도전#2

들뜬 채

청소년기를 시와 함께 한 것을 친구들이 조금씩 알게 되었다. 집에 놀러 오면 책상 한켠 쌓여가는 연습장 때문이었다. 보통 학생의 연습장이랑 빡빡하게 채워진 영어단어와 수학 문제풀이과정이 전부 아닌가. 때론 시험기간이면 사회, 과학, 한문 등의 과목을 쳐내기 위해 영혼과 따로 놀며 기계적으로 적힌 글자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이내 버려지는 사물일 뿐이다. 그런데 유독 내 방 한 켠에는 버리지 않고 고이 쌓이는 링 연습장이 있었다.


연습장을 뒤적이면 매일 비슷한 그저 그런 내용이 빼곡했다. 그런 나의 작품을 훑으면서 안위를 얻기도 했다. 내용의 질적 수준보다 내가 무엇인가 끄적이고 있었다는 것에 안정감을 느꼈다. 대부분 연애 시가 많았다. 대상이 있건 없건 불특정 존재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 그리고 기다림이 그 내용이었다.


아마도 그 시절 나는 어른은 누군가를 정당하게 사랑하고 때론 무반응에 아파할 수 있는 자립적 존재라고 여겼던 기억이 난다. 자립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찾아내며 그 감정을 외부로 선하고 아름답게 꺼낼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의 행위는 목표를 도출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아름답게 바라보는 선망의 대상에 끼이고 싶은 어린 마음을 소심하게 숨어 발휘했던 것이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니, 책임에 능숙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줄 모르고, 그저 학업, 성적, 진학이라는 부담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독서실 중독은 고3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내 방에는 창작공간에서 이뤄낸 승리의 전리품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적은 용돈으로 연습장을 사는데 다 쓸 판이어서 회색빛 종이로 만든 갱지 연습장을 사서 쓰게 되었다. 미색 연습장보다 2/3 가격에 구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


미색 종이가 너무 밝아 나를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면 회색빛 오래된 느낌의 종이는 나를 더 끌어당겼고, 매일 똑같은 말일지라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를 기다렸고 노래했다. 빈자리, 그리움, 사랑, 기다림을 자주 끄적였다.  대상이 누구든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쓰는 존재라는 사실로 위안을 얻었다. 샤프펜슬 끝에서 전해지는 싸구려 회색빛 연습장 종이에 거친 표면이 친근했다.  긁히는 거친 질감을 사랑했다. 우주 한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나를 잡아주는 거칠지만 익숙한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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