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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Sep 10. 2019

여우비 장대비 달팽이

일시정지, 느린 빠름..

태풍 링링으로 곳곳에 비보가 전해져 안타까웠다. 간헐적으로 비가 오다 멈추더니 꿉꿉했다. 제습보다 냉방을 해야 할 늦더위. 아이들은 불쾌지수에 곤두서 있었고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었다.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덮여 일전의 파란 하늘을 못 본 지 오래되었다. 차라리 비가 더 내리지.


오후가 다 가기 전에 어서 비가 쏟아지길 기다렸다. 불쾌감을 떨치고 싶었다. 오늘 처음 온 아이는 실내에 흐르는 음악에 고개를 까딱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하는 아이들, 수업을 기다리는 아이 몇 명이 앉아있었다. 적막이 무겁게 가라앉아있을 즘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다다다다. 어항에 구피 가족들을 쳐다보던 아이도, 책을 읽던 아이도, 처음 등록해서 어리둥절하던 아이 모두 유리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빛이 하늘에서 공방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빛줄기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줄기 같다는 말이 과하지 않았다. 우리는 폭포 앞에서 관광객처럼 놀라 얼어붙어버렸다. 모두 눈이 부셔 찡그린 채 '우와'만 연발했다.


유리문 너머 세상에 펼쳐진 여우비의 장관.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신비했고, 내리꽂는 빗줄기는 나뭇가지를 격렬하게 흔들고 주차한 자동차의 보닛이 뚫어지게 두들겼다. 장엄함 앞에 일시 정시, 몇 초 후 다들 약속한 듯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촬영했다.


장대비는 10여분 이상 지속되었고, 햇살은 더욱 강렬해졌다. "강의실로 들어가 수업 준비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내 일이 그런 일이니까. 하지만 아이들의 고요한 환호와 들뜬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일시 정시. 내가 일시정지를 시켰다. 이 감흥에 집중하도록 했다. 아직은 책을 다 시 펼 때가 아니야. 지천에 널린 자연의 책을 읽을 때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머릿속에 이 장면을 다 담아보자꾸나."


아이들은 오늘처럼 강력한 여우비는 처음이라고 했다. 몇 곱절 나이가 많은 나도 처음이었다. 이 추억에는 우리는 동기동창이다. 가로 4미터의 유리문 프레임에서 바라본 장관이 아쉽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비가 온 다음날 아침 공방 유리문에 붙어있던 달팽이 여럿처럼 다닥다닥 문에 붙어 햇살과 장대 빗줄기에 마음을 샤워하였으니, 나중에 명치까지 답답한 날들이 오면 이 장면을 꺼내서 사용하면 어떨까?

비가 온 다음날 아침 공방 유리문에 붙어있던 달팽이 여럿처럼
다닥다닥 문에 붙어 햇살과 장대 빗줄기에 마음을 샤워하였으니,
나중에 명치까지 답답한 날들이 오면
이 장면을 꺼내서 사용하면 좋겠지?



자리에 앉아요. 자기 일에 집중해요. 시간을 아껴요. 더 많이 읽어요. 더 꼼꼼히 적어요. 많이 써요. 왜 그런지 생각해보라는 말로 채찍을 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고삐를 풀어줄 때도 있어야 한다. 오늘 이 그랬다. 처음 온 아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새로운 문화에 넋이 나간 듯했다. "너도 귀한 장면 머리에 다 담았지?"

한결 부드러워진 아이들은 남은 시간 몇 배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 또한 나의 빅 픽쳐라는 사실. 느린데 빨라지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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