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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Sep 23. 2019

오늘 선풍기를 결심했다.

'추분'에 선풍기를 넣고 보일러를...


나는 1년 365일 중 200일 이상 선풍기를 애정 한다. 결혼 전 이 사실을 몰랐고 결혼 후 아이를 갖고 열이 많아져 그러는 줄 알았다. 선풍기를 틀면 천국을 경험한다. 가장 약한 미풍으로 틀어 어디선가 자연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 바람을 느끼노라면 산속에 들어서는 것 같다. 선풍기라는 기술문명이 처음 발명되었던 날을 축복하고 싶을 만큼 선풍기가 좋다.

애정하는 선풍기, 가을에는 안녕.

남편이 타박을 했다. 여름이 끝나고 날이 선선해 방바닥이 서늘한데 선풍기는 여전히 돌아간다고 툴툴거렸다. 내가 누운 쪽으로만 초미풍 바람이 오게 각도를 잘 맞추어야 한다. 일각이라도 틀어지면 남편의 발을 더 시리게 해 선풍기를 켤 수가 없으니까.


가끔 남편이 잠들기를 기다다. 호흡소리가 낮고 깊어지면 밤도 깊어진다. 잠을 뒤척이다 결국 선풍기를 틀어야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선풍기는 나에게 천국을 가져다준다. 발부터 훑어 올라오는 시원한 바람이 좋아 이불을 당겨 배만 덮는다. 그래서인지 다리가 그리 튼튼하지 못하다. 몸조리할 때도 이불을 발까지 덮지 못하고 양말도 10분 이상 신고 있지 못할 만큼 답답해했다. 밀폐와 조이는 감각을 유독 싫어하는 줄 그때부터 발견했다. 여러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약하지만 절대로 비밀에 부친다. 잘못하다가는 선풍기에게로 탓이 돌아가 그것이 유명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있다면 단연코 선풍기다. 에어컨과 선풍기의 바람은 질적 차이는 크다. 바람 질감의 질적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예를 들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만큼이라고 해보자. 올여름 유난히 비가 많아 에어컨을 많이 틀지 않았다. 선풍기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내가 애정 하는 선풍기를 마음껏 향유한 올해 여름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의 수고를 알면서 더 의지한다. 1년 365일 며칠씩 선풍기를 틀어놓을 때도 있어 그의 과중한 노동에 미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올여름 많이 수고했다고 토닥여 주고 긴 휴식을 선물하겠다 몇 번이나 결심했다. 그런데 가을 실감하는 지금까지 노동착취를 감행하고 있으니 나는 좋은 주인은 되지 못하겠다.


 달력을 보았다. 음력 8월 25일 추분!이라고 적혀있었다. 추분은 24절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다. 이후 밤의 길이가 길어지고 가을걷이가 본격화되어 가을을 실감하는 절기라고 한다. 태풍이 올라와 비까지 오니 가을이 절절하다. 아침에 선풍기를 넣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이 에게는 그냥 정리해서 넣으면 되는 것을 나는 굳게 결심하지 않으면 정리할 수 없는 대상이다.


결심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작년까지와 달리 선풍기를 켜 두면 마음은 풍요롭되 다리며 발이 시렸다. 올 것이 왔다. 내 코가 시원하지만 뼈마디 관절 사이를 고려해야 하는 나이로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 老의 길이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나에게도 비켜가란 법이 없다. 찜질을 하며 종일의 피로를 풀어도 모자란 하체에 체온을 떨어트리는 선풍기란, 이제는 아닌 것이다.

진작 했어야 할 결심 이제 한다. 작년 겨울에 보일러와 함께 여전히 활발하던 선풍기를 올해는 그만 틀어야 된다. 계속 사용하자니 몸이 안따르고 이별을 고하려니 그 또한 바람이 그리워진다. 양쪽으로 나뉘는 마음을 추스르고 선풍기를 넣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추분이니까. 핑계가 좋다. 아니, 결심의 동기부여를 추분에서 얻었다.


결심만 하고 일단 출근을 했다. 오늘 밤 다시 꺼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그래, 과감히 넣지 말고 일단 겨울이 오기 전에만 넣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타협하는 마음을 살짝 꺼내본다. 겨울만 아니면 되지. 그렇지? 겨울의 문 앞에서는 이별할 수 있겠지요.


나의 사랑 나의 선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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