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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Dec 30. 2019

아침메뉴는 미리 묻지 말길

방학이다. 삼시 세 끼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작은 아이가 친구 집에서 신나게 놀았는지 늦은 밤 픽업하자마자 구겨져 잠들었다. 겨우 깨워 침대에 뉘일 때까지는 비몽사몽이더니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계속 자면 꿀잠일 것을 배가 고팠나 보다. 한창 키가 클 나이라 잘 먹기 시작하는 통에 간단한 간식을 찾았다. 아이는 좋아하지도 않는 시리얼을 순식간 해치웠다. 티브이를 잠시 보더니 다시 자러 들어갔다.


"엄마, 내일 아침 뭐야?" 시간은 밤 11시를 달리는 중이고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몇 분이 지나도 답이 없자 아이는 잠을 이기고 다시 물었다. "엄마, 내일 아침 뭐 해줄 거야? 맛있는 거 해줘." 나는 조금 전 먹고는 아침밥을 말하는 게 이상해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아니, 배는 안고픈데, 내일 아침 뭐 먹을지 기다려져서" 기대란 말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오래전 잃어버린 것이 기억난 것처럼. 언젠가부터 나는 아침을 기대하지 않고 살아왔다. 나의 아침은 또 다른 노동의 시작이었다. 자고 일어나도 피로가 더 쌓이는 중년이 될 때까지 매일 도착했던 곳은 주방. 쌀을 부어 씻고 앉히고 다시 침대로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이었다.


국과 반찬, 뭐부터 만들지 생각한다. 어젯밤 미리 생각해둘걸. 비몽사몽엔 뇌가 활성화되지 않아 버퍼링이 걸린다. 한참을 열어둔 냉장고 문이 띵똥 사인을 보낸다. 저도 팔이 저린가보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냉장고를 닫아둔다. 밤에 미리 생각해 두어도 아침이면 새까맣게 지워져 버리니 미리 생각해두는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억 보유기간이 너무 짧아진 것 아닐까? 치매 전조증상인가? 오래 생각하다가 결국 가장 간편한 국물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시 새벽을 쥐어짠다. 찬류가 생각나지 않는다. 밑반찬은 좀체 수저를 대지 않는 가족들이 그나마 먹는 젓갈류나 조미김을 꺼내기로결정한다. 아차, 이를 어쩌나. 간편한 국물류를 만들려니 그것은 작은 아이에게  맛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 내일 아침 뭐 맛있는 거 해줄 거야?" 맛있는 것이어야 한다. 매일마다 바뀌는 그녀의 입맛. 어제 맛있던 것은 오늘 맛없는 것으로 자주 둔갑하니 여간해서 감을 잡을 수 없다. 부족한 요리실력과 쇠퇴하는 기억력, 그리고 피곤함의 삼박자에 아침은 무거운 것으로 변한 지 오래다.

출처:픽사베이

그런데 아이의 말이 위안을 준다. 지금껏 엄마가 차려주는 집밥이 맛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일 밥상을 기대하는 것 아닐까. 게슴츠레한 눈을 비비며 머리를 질끈 묶고 밥을 하던 노고가 쌓였나 보다. 아이는 "오늘 시금치무침 최고야, 삼겹살이 잘 굽혀서 고소하고 바삭해, 엄마 이거 엄마가 한 거 맞아?"와 같은 반응으로 소박한 나의 솜씨를 칭찬했다. 긍정의 경험이 모여 잠들기 전 내일 아침 상을 기대하는 아이가 되었다 생각하니 새 힘이 솟았다. 밥이 아닌 다른 경험치도 쌓인다면 아이는 매일 새로운 날을 기대할 것이라는 믿음. 이제 내가 아침이 두렵지만 벌떡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이유가 되었다.


아이야, 내일 밥상을 기대하는 짧은 너의 밤

엄마는 내일 밥상이 두려웠구나.


수고의 땀방울이 너에게 쌓여   

기대하며 잠드는 시간

너의 소망처럼 나도 희망하며

내일 밥상 그까짓 것

금세 휘리릭 차릴 수 있겠다.


그런데, 메뉴는 미리 묻지 말길.  미리 계획도 안서지만 다음날 기억도 안나. 그냥 행복하게 준비하겠다는 결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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