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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Feb 05. 2020

냉동실 탈탈 털기.

내일 아침메뉴는 쌀국수?

최근 지출 분계선을 자주 넘어버려 긴축재정을 시도하고 있다. 친정엄마가 냉동실에 있는 재료만 써도 한 달은 살겠다는 말에 착안했다. 이 계기로 그동안 나의 소비를 되짚을 수 있었다. 잘 먹는 아이를 둔 덕에 식재료가 많이 든다는 소리는 핑계였고 급할 때 요긴하다는 이유도 불온했다. 빡빡한 살림살이에 마음 밑바닥까지 퍽퍽해지면 장을 보곤 했다. 생의 불안을 소비라는 심리적 페이크로 침소봉대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한 달 버티며 축난 재정에 쉼표도 찍고 나의 안정감의 기초가 얼마나 종잇장처럼 얄팍한지도 확인할수 있겠지.  '냉동실로 한 달 살기'로 시작한 고행의 일부를 남겨본다.


한 달 살기를 결정한 나는 냉동식품 덕후다. 냉장고는 80프로만 채워야 저장효율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꽉 채우기 전략으로 20프로 이상 효율을 떨어트리고 사는 것 같다. 물가폭등이나 자연재해를 코앞에 두고 식품 사재기를 하는 사람처럼 물건값이 싸거나 원플원, 반값 찬스일 때를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사재기하는 날은 집안에 있는 반찬통과 위생봉투, 지퍼락이 총출동하는 날이다.


냉동식품 덕후라고 했지만 살을 붙여 말하자면 '식자재 냉동저장' 덕후다. 나의 채소 저장법은 주객전도 스킬이다. 신선한 채소를 사면 금세 요리해 먹으면 가장 신선하고 건강에 유익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씻고 데치고 물기를 짜서 소분해 얼리는 일을 부러 만든다. 한번 소분해서 저장하면 쓸 때마다 간편하긴 했지만 근처 마트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괜한 일이 아니었을까. 일전에 시금치가 특가로 나와 세단을 사서 위의 절차를 따라 저장하면서 주방에 한참 서있었더니 무릎이 시큰했다. 그냥 먹을 만큼 사서 먹고 필요할 때 마트를 다녀오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처럼 하나 건너 마트인 나라가 어디 있을까. 간단한 방법을 거꾸로 복잡하게 하니 주객전도 스킬이라고 붙여보았다. 


채소 저장이 주객전도 스킬이라면 육류의 저장은 복잡 미묘 스킬이라고 할 수 있다. 돼지고기도 부위별로 찌개용, 수육용, 불고기용, 카레용등으로 소분한다. 소고기도 국거리, 불고기거리 장조림류를 세일할 때 사서 소분한다. 고기를 소분하다 보면 우리나라 음식의 조리법과 요리에 맞는 고기부위도 얼마나 다채로운지 놀라웁기 그지없다. 냉동실을 납작하고도 조밀하게 채운 식재료를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꺼낼 때마다 나의 이상한 부지런함에 자긍심이 들썩이기도 했다.  


고기를 말하니 닭가슴살을 빼놓을 수 없다. 건강한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운동을 시작한 큰아이를 위해 산 닭가슴살이 냉동실 서랍에 가득 차 있었다. 필요할 때마다 새벽을 가르며 배송해주는 업체 덕에 떨어질 새가 없다. 밋밋하고 허전한 맛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름기가 적다는 사실은 큰 장점으로 보여 반대하지 않고 구매해왔다. 


냉장고 털어 한 달 살기로 긴축을 하려니 끼니마다 메뉴에 한계가 있다. 재료의 부족이 아니라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제한 때문이다. 제일 먼저 소비해야 할 단백질 종류를 고민했다. 닭고기로 쌀국수를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이도 물렸는지 최근 줄어들지 않는 바람에 급처리가 필요했다. 쌀국수 메뉴를 가족들에게 말하고 잘 시간이 가까운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뭐해먹지? 냉동실을 어떻게 비우지?" 쌀국수 메뉴를 까맣게 잊고 냉동실 앞을 다시 서성였다. "내일 아침 삼겹살 먹을까?"라고 말했더니 아이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엄마, 좀 전에 쌀국수 먹는다고 말했잖아. 까먹었어?"(절대로 기억력 감퇴 사건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 냉동실로 한 달 버티겠다는 결심에 냉동실을 비운다는 목적에 너무 충실했다. 해본 적 없는 메뉴를 성급하게 정해서인지 정해놓은 메뉴를 깜빡한 것이다. 쌀국수든 삼겹살이든 다시 고민했다. 결국 아이들의 결정을 따라 쌀국수라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밀가루도 아니고 기름기도 없는 데다 쌀이 원재료니 아침으로 제격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일 아침 결대로 찢은 뽀얀 닭고기와 면을 호로록 소리 내어 먹겠지. 처음 해본 요리든 아침에 어울리지 않는 메뉴라도 중요치 않다. 냉동실로 한 달만 살 수 있다면, 어떤 요리도 가리지 않아야 목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돼지고기 그다음은 소고기로 전진하기만 한다면 통장에 머물 새 없이 빠져나가던 돈이 잠시 머물러 주겠지. 이렇게만 진행된다면 '냉동실 한 달 살기' 거뜬히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제 내일 메뉴 고민은 끄읏. 밤마다 다음날 아침메뉴를 고민을 하는 사람이 왜 나여야만 하는지 잠시 꿈틀거렸지만 다음에 글로 쓰겠다고 넘겼다. 쌀국수만 생각하기로 하자. 이제 냉동닭가슴살을 물에 담가놓아야겠다. 내일 아침 바로 출동할 수 있게 말이다.




여러분도 미리 굿모닝. 내일 아침부터 든든하게 먹고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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