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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Dec 31. 2019

좋겠다. 다육이의 겨울방학

멈춤에게 보내는 찬사

여름방학은 놀기 좋다. 한파가 닥친 겨울방학의 시작점에 놀기 좋았던 여름방학을 추억한다. 땡볕더위에 실컷 물놀이하라고 학원도 잠시 보류하고 전국에 여행지를 훑어본다. 캠핑, 서울여행, 해외여행, 제주도 한달살이 모두 여름에 하기 좋다. 겨울방학은 그와 반대의 성격이라는 말을 하려고 서두가 길어졌다.


겨울방학은 공부시키기 좋다. (공부하기 좋다고 말할 뻔했다. 아이들이 할 말이 아니겠지) 부모들은 날씨도 춥고 친구도 자주 못 만나는 아이를 평소보다 조금 더 공부시키려 계획을 짠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겨울방학을 제일 싫어한다. 방학식 날이면 아이들은 웃다가 울다가 이상하게 행동한다. 방학이라 좋은데 학원을 더 많이 가서 벌써 질린다고 한다. 엄마가 질세라 그간 밀린 학습지와 문제집을 꺼내 쌓아둔다. 눈에 띄는 곳에 두고 칭찬 스티커판을 냉장고에 붙인다. 핸드폰 신상 구매나 원하는 품목을 사줄 약속과 함께 아이는 못 이기는 척 책상 앞에 앉는다.


겨울방학이 공부하기에만 좋을까? 겨울방학은 이불 밖은 위험해 겨울잠을 자기에 딱이다. 실내와 실외 온도차가 커 현관을 열면 쓰나미처럼 불어오는 칼바람을 겪고는 쉽게 외출을 결심하지 않는다. 따뜻한 거실에서 티브이를 켜서 이불을 덮고 귤을 까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거기에 고구마까지 출현하면 금상첨화. 방귀는 봉봉봉 나오고 나른한 오후 늦은 잠을 자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가 느슨하다.


공방에 식물이 많다. 의도치 않게 식물이 늘어나 군락을 이루었다. 대개 소형 식물이 주를 이룬다. 빛과 공기와 흙만 있어도 잘 자라는 다육이 종류가 늘어났다. 지인의 건너 지인이 이사를 하시며 자식같이 키우던 다육이를 버릴 수 없다며 건넨 이유에서다. 글 공방인데 식물 공방처럼 보이는 반전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파릇파릇한 기운에 가을까지 동네 어르신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했다. 매일 자라는 것이 눈에 보였고 잎이 하나씩 떨어져 새잎이 나오려는 다육이를 공방 아이들에게 분양해주기도 했다. 정면으로 내리는 볕이 좋아 식물들의 천국이라 불러도 그럴듯했다.

식물들이  나의 허락도 없이 아이들보다 일찍 방학을 시작했다. 자연의 섭리는 놀라워 새벽 공기가 이전과 확연히 차이가 나던 날부터 성장을 멈췄다. 이럴 때 물을 더 주었다가는 물러지고 썩거나 병에 걸리기 쉬워 가만히 두어야 한다. 매일 매만지고 물을 주고 다듬고 채우던 손이 한가해졌다. 가을 언저리부터 멈추었던 식물들이 얼까 공방 안으로 들이던 날 다시 새순이 올라올까 기대도 했다. 새순 소식도 없을 뿐 아니라 사망 소식도 없으니 다행이다. 모든 식물은 딱 멈춘 것이었다.

멈추었을 때 쉬어야 할 때다. 온도도 높여주고 환기를 자주 한다고 한겨울에 다시 새순이 나지 않는다. 식물은 겉으로 성장이 멈추어도 속으로 성장한다. 속이 더 단단해진다. 가뭄이 심할 때때 나무의 나이테가 더 조밀하다. 조밀한 만큼 밀도도 높아 단단해진다. 어려움은 잠시 멈추게 해도 속으로 자라는 것을 막지 못한다. 멈춤이 뒤쳐짐이 아니라 다음 이어질 성장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 추워서 속으로 자라는 식물은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된다.

겨울은 아이들을 속으로 자라게 한다. 1년 동안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의 지휘 아래 하모니를 맞추느라 억울해도 참고, 섭섭해도 다 말 못 하고 때론 함께 웃으며 다사다난했었다. 복잡했던 시간이 재해석되고 풀어져 속으로 단단해진다. 머리로 들었던 가르침이 속으로 열매 맺는다. 잠시 멈춰 속으로 단단할 기회를 줘야 한다. 겨울방학은 그런 의미에서 멈출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자연의 이치와 아이의 자람이 많이 닮았다.


속으로 자란다는 것의 의미 중 몰입을 주목해본다. 작은아이의 성장은 몰입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교과와 상관없는 관심사에 침잠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 과학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흥미와 만족 성취감과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면 몰입에 무엇인가 있다. 엄마가 먹여주는 주제가 아닌 자신이 찾는 주제에 대한 몰입. 식물의 동면, 동물의 겨울잠은 겉으로 멈추고 속으로 채운다면, 아이좋아하는 것에 몰입하며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학기 중 아이의 창의적 활동은 다음날 등교라는 고정 스케줄로 흐름이 자주 끊겼다. 내일 지각해도 된다고 허락해도 작업을 중단해버린다. 내일의 불편을 겪기 싫기 때문이다. 방학은 학기만큼 경직될 필요 없으니 시간을 고무줄처럼 밀고 당길 수 있다. 하루에 해야 할 기본적인 활동 외에는 모두 아이에게 맡긴다. 그림을 며칠 그리거나 가위질만 종일 해도 약속한 숙제며 영어 듣기만 한다면 통과다. 한자능력 검정시험이나 초등 필수 영단어 500개 암기, 다음 학년 역사연표 외우기 등의 목표를 안겨주고 싶지만 꾸준히 체크할 자신이 없어 슬그머니 내려두었다.


큰아이는 복습과 예습, 다음 학년 교과 관련 책 미리 읽히기를 했다면 작은 아이는 그냥 두기로 한지 수년이 지났다. 두 아이를 다르게 양육하지만 차이는 미미하다. 아이마다 특성이 다르고 집중력이나 동기부여받는 방식도 다르다. 첫째 때는 그것을 몰라 엄마 주도로 끌고 갔다. 지금은 아이 주도로 가고 있다. 방목인지 방치인지 결과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그리 나쁘지 않다. 결과가 말해준다고만 믿지 않기 때문이다. 과정이 좋으면 성장이라고 정의 내리는 엄마 덕에 아이는 매일 심심하다고 말할 겨를이 없다. 게임할 시간도 없다. 엄마가 비교하지 않고 대학에 목메지만 않으면 겨울방학은 멈추어 단단해지기 좋은 시간이다.


냉혹한 겨울, 공방 현관 틈 사이로 황소바람이 분다. 식물들이 그 바람에 얼어 죽지 않아 대견하다. 추위에도 견디면 속이 채워지는지 줄기가 두꺼워 지는 것만 같다. 내년 봄에 싹을 틔우는 밑 작업을 하나보다. 속으로 열심을 내는 작은 손가락들이 씩씩해 보인다. 모든 과정은 허투루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과정은 허투루 돌아가지 않는다.



이틀째 가위질만 하고 있는 작은아이의 손가락에 근육통이 오지 않도록 뜨거운 찜질을 해주어야겠다. 이번 겨울방학은 가위질로 몰입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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