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0대, 장마에 멜랑꼴리! 문정희<먼 길>처방전

장마에 멜랑꼴리

by 최신애

비가 추적추적 옵니다. 마음이 헛헛하면 시를 읽어요. 지극히 사적인 감상입니다만, 40대라면 끄덕일 감상일 듯, 고쳐 쓰지 않고, 내일 아침 이불 킥 각으로 일필휘지 합니다요. 용서하시길. 이불 킥한다고 이 글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랍니다. 용감하게 오늘은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우리 그렇게 한 번은 정신줄 놓고 글을 쓸 때도 있어야죠.


먼길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1연을 마주하고 40년 이상 살아온 삶의 자국을 돌아본다. 인생이란 먼 길은 어디에도 아는 길이 없는 여정이었다는 것. 신이란 것을 신고 그냥 걸었다는 것은 살아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이다.


생은 잠깐의 행복과 이면의 지긋지긋함이 한 몸이다. 예측하지 못할 어려움이 생의 곳곳에 널려있었다. 어디에도 아는 길 없이 모든 과정이 처음이어서 어쩔 줄 몰랐다. 오늘이 무사히 지난다 해도 내일 닥치는 일을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을까. 사람들 중 자신이 가는 그 길이 어떠할지 어디로 열릴지 알고 가는 이는 없다. 모두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래서 또한 희망을 놓을 수 없는 끈이 된다.


오늘도 흘러가는 세월을 생각하니 쏜 화살처럼 빠르고 무엇으로 채우고 있나 한숨이 나왔다. 신이란 걸 신고 그냥 걸어서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애를 쓸 때도 많았지만 저절로 떠밀려 온 것도 있다. 어느 것은 내 것이고 어느 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경계를 분명히 나눠 내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 없다. 누군가에 의해 왔더라도 허락한 것, 발을 뗀 것은 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를 탓해도 내가 걸어온 것이다. 그저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어느덧 여기고, 벌써 이만큼이다. 느리길 바라는 시간은 우리의 원하는 바대로 해주지 않는다. 느리게 느리게 바라면 더 빨라지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시간이다. 뒤뚱거리며 걸어온 시간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안을 줄 알아야 한다. 남의 탓을 하며 내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처연하게 주저앉는다고 시간이 돌이키지 않을뿐더러, 놀랄만한 기회를 안겨주지도 않는다.


뒤뚱거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함, 어리석음, 분별없음, 두려움으로 점철한 마음을 긍정해야 한다. 그것이 안아주는 방식이다.


사람은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발을 가졌다. 나무가 제 한 몸 버티기 위해 키보다 더 크게 몸통보다 더 두꺼운 원뿌리와 머리카락보다 많은 잔뿌리를 가졌다. 화자가 말하는 나무뿌리의 지혜와 든든함을 이렇게 이해하는 게 옳을지 모르지만, 감상이란 나의 것이니 사막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뿌리의 크기가 제 몸의 몇 배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혜롭고 든든한 나무의 뿌리마저 닮지 못하는 하찮은 인간의 마음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뒤뚱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 아닐까. 늘 후회하고 미안하기 일쑤며 비열한 자신에 치를 떠는 게 사람의 일 아닐까. 뒤뚱거리는 게 아이만의 일이 아니다. 나이가 먹을수록 더 뒤뚱거리는 마음 숨길 수 없다.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이 시구가 장마를 시작하는 오늘 유난히 가슴을 절절하게 한다.


20대에는 세상에 못할 게 없을 줄 알았다. 기회가 없어 후지게 산다고 생각했다. 나를 발견하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했다. 얼마나 우스운 호기로움인가.


30대는 가족이 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얽히고설키며 복잡해지는 관계는 저마다의 공로와 섭섭함, 애정과 미움의 연속이었고 그것을 쉽게 풀 재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나를 둘러싼 관계라는 이유가 나의 날개를 묶는다고 생각해야만 마음 한편 편했다.


그런데 40대가 되니 조금 알 것 같다. 인생 선배들이 보기에 아직 걸음마 수준의 깨달음이겠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저 누구나 다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고 그 길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의 모양새일 뿐이라는 것을. 사람마다 다 주어진 인생을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일개 성공이라는 것은 타인의 것과 비교되기 쉽고 성취라는 것은 수십억만 개의 성취 중 하나로 전락한다. 소확행이라는 것으로 잠시 위로하지만 큰 불안이란 불을 꺼트릴 수 없다. 욕망은 끝이 없고, 비교는 칼날 같다. 아이들은 자라고 나의 불행을 대신해주길 바라서 몰아세우고 밀어줘도 엇갈리기만 한다. 비상을 원하지만 가파른 계단이 아니라,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름이다. 비상할 수도 없고, 비상이란 게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 사실이 진실이라도 놀라지 않을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가 40대일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인생의 길, 그 가파른 계단을 주관적으로 풀다 보니 장마전선에 젖어 마음마저 습해진다. 비상을 거부하는 계단 가운데 어디쯤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다시 위를 올려다본다. 40대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일까. 호기롭던 사람의 어깨에 삶이란 무게가 얹히면 허세는 꺾이고 기운은 쇠해진다. 게다가 높이 비상하려 하면 할수록 더 가라앉게 된다. 아예 계단을 오를 힘 조차 스스로 잃게 된다. 바닥 없는 야망을 꾸역꾸역 움킬수록 그 실체가 허상임을 알 때 절망이란 몇 곱절로 찾아오게 된다. 그냥 신을 신고 걷듯, 뒤뚱거리며 묵묵하게 걸어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어디에도 아는 길이 없는 인생을 따라 걸으면 어느덧 옹골찬 지혜와 단단한 나무의 뿌리를 소유한 백발이 되지 않을까?

*한큐에 빛의 속도로 글을 쓰니 속이 후련합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공방, 비 오는 소리 asmr과 실제 밖에 비 오는 소리가 겹칩니다. 퇴근합니다.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내가 더 사랑스러워지는 저녁입니다. 여러분의 지혜와 든든함이 날로 나무뿌리 같아지시길..(모든 비유적 표현은 시에서 빌려 씁니다. 시를 두서너번 읽어보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