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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Aug 02. 2020

여름엔 찰옥수수란다

딸아이가 여름이 들어설 때부터 옥수수 타령을 했다. 옥수수를 삶다가 실패한 적이 있어 꺼리는 간식이었다. 기껏 삶았다가 딱딱해서 버리고, 맛이 없다고 천덕꾸거리가 되곤했다. 그래서 마트에 데워먹으면 되는 옥수수 외엔 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도 몇번이지 옥수수를 즐기지 않는 엄마때문에 아이는 옥수수를 자주 먹지 않았다. 나에게 옥수수는 실패의 상징이며 금기였다. 다른 음식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데 옥수수는 내게는 먼 식재료였다.


그런데 아이가 뜬금없이 찰옥수수를 제일 좋아한다고 사달라 노래했다. 장난이겠거니 했더니 진심이었다. 그래서 사과처럼 아삭아삭하고 과일의 당보다 몇 배 높다는 초당 옥수수를 구매해 삶았다. 그런데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은 덜 익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삶지 않고도 먹는다길래 한 입 깨물었더니 비리고 떫은 기운을 지울 수 없어 멀리 물렸다. 20개 한 박스 제품을 삶아 냉동실로 다 보내버렸다. 후련했고 다시 꺼내 먹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조만간 쓰레기통으로 향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초당옥수수의 사연을 뒤로하고 아이는 다시 찰옥수수를 노래했다. 때마침 마트 행사로 2980원에 5개들이 찰옥수수를 샀다.

젓가락 찔러 쥐어주니 오독오독거리며 먹는게 거실 구석에 있는 햄스터와 닮았다. 내 아이의 입맛을 멍청하게도 눈치 못챈 엄마구나 자책하려는 찰라 복잡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괜한 미안함. '좋아하면서 말하지 않을 것일까?  아이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몰라줄 정도로 무관심한 엄마였던가. 얼마나 먹고싶었을까'라는 생각이 복잡한 교차로위로 얽혔다. 그리고 아이의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자신감도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에 대해 어떻게 다 알수 있을까. 모르는 점 투성이가 당연한 것을. 어제까지의 아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늘의 이 아이는 난생처음인 것을. 아이를 잘 모르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언제부터 옥수수 좋아했니? 엄마가 챙기지 않아 섭섭하지 않았어?"


"아니, 그냥 그러다가 까먹고 말았어. 아무 생각 없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아이의 새로운 취향에 놀라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그저 현재 옥수수가 좋아보이고 먹고싶다는 생각만 말했다. 더 물어보니 방송에서 옥수수 먹는 장면을 많이 본 이유라고 했다. 아이의 취향은 오래 된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추측했던 슬픔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결핍이 아이에게 부정적이었을까봐 지레 염려한 것이었다.

 

심각하게 과거를 소환하면 부정적 감정이 찾아온다. 오늘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쓸모 없었다. 아이는 갑자기 취향이 생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지금 취향에 맞게 옥수수를 대령하니 신나게 먹으며 행복을 느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이의 정직한 요구와 누림. 그것을 만끽하면 되는 것이다.


별일 아닐 땐 별 볼일 없이 지나가도 되는구나. 굳이 불러 세우고 따질 필요 없는 일도 많구나. 찰옥수수사건으로 매사 진지하려는 나의 생각의 습관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일상의 작은 기쁨은 있는 그대로 바라볼때 누릴 수 있다.  


아이는 내일이 없는 듯, 정열적으로 옥수수를 해치웠다.

 2020년 여름, 내 아이는 옥수수를 무척 원했고 나는 필요를 말할 때 채워주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괜한 의미부여때문에 목구멍까지 채우는 근사한 옥수수향을 만끽하지 못할 뻔 했다.

휴가 마지막날 드라마를 틀며 김이 펄펄 나는 옥수수 몇개 더 그릇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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