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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Dec 06. 2020

남편의 여성호르몬

"너무한 거 아냐? 도대체 하루 종일 단 한 번이라도 전화해볼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이 남자 이상하다. 늙은 게 틀림없다.

"당신,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게야? 왜 그래?"

내가 왜 생각을 안 했겠는가. 사실 안 한 게 맞다. 이제 이 남자의 마음에 생채기가 생길까 봐 하루 종일 당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어 하얀 거짓말을 했다. 하얀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극도로 싫어하는 남자에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정말 하루 종일 바쁜 일들로 존재 하나를 품을 생각을 못했다.

"여보, 내가 아침에는 당신 대신 시어머니 치과에 모셔다 드리고, 대출 때문에 은행 다녀오고, 도시락 3분 만에 먹고, 학생들 코칭하고 관리하고 업무 다 보고 나니 학부모 상담으로 두 팀과 이야기 나누고 이제 한숨 돌리는 중인데. 당신의 오늘은 어떤지 전화해볼까 생각하려는데 전화가 와서 이러면 섭하지? 사과받아야 쓰겠네"


사실, 남편을 살필 새가 없다. 새로 계약하는 건물의 하자로 시간과 업무 진행에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년말과 년초 공방의 공간확장과 시스템 도입  기대하고있었는데 수포로 돌아갈 위기다. 이 상황에 '보고 싶었어? 전화를 왜 안 해?"라는 앓는 소리는 배부른 소리다. 이 남자가 늙어가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너무하잖아. 세미나로 집에서 엊그제 나와 3일이나 지났는데, 내가 해야 전화 받지, 안 받을 때도 있고. 당신이 먼저 전화를 한 번도 안 하는 건 쫌....."


"전화해도 재미가 있어야 하지. 최근, 당신 나를 너무 쉽게 생각했어. 전화하면 자기가 바쁠 때 "끊! 어!"라고 말하던 분이 누구실까? 이제 내가 그렇게 해야겠네"


남편은 결국 오늘 하루 참 바빠겠구나로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재빠르게 내가 외쳤어야 했다. '끊! 어!' 생각처럼 입이 움직이지 않고 가식적인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여보, 조심해서 세미나 참석하고 와요"

아이참, 좋게 훈련된 말투가 이럴 때는 튀어나오니 별 수 없다. "끊! 어!"라고 복수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했다.


남편이 요즘 내게 건네는 말들이 예전과 매우 다름을 느낀다. 슈퍼맨이 되어야 된다는 모종의 자기 암시를 벗기 시작했다. 아빠라면, 남편이라면, 남자라면, 가장이라면, 아들이라면 다 해결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굴레를 벗어나는 남편이 한편 반갑다. 그리고 나에게 앓는 소리를 하는 것도 무척 속이 후련하다. 내가 복수할 기회를 만난 것이기도 하고, 예전에 일에 몰두되어 정신없던 남자를 정서적 요구로 집요하게 괴롭던 시간을 반성할 수 있어 감사하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를 잘 알아가는 것이며, 서로의 변화를 수용해주는 것이고, 때론 닮아가고 때론 그것을 이용해 교묘한 복수를 하면서 생의 위트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다. 한 번만 더 전화 오면 큰 소리를 외치고야 말 것이다. "끊! 어!"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하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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