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신애 Dec 17. 2020

쓰는 사람의 크리스마스 시즌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작업실이자 생업의 터인 공방이 있지만 글은 잘 안 써진다. 집은 따뜻하지만 아이 둘이 나의 자유시간을 사용하길 강요한다. 그리고 널브러져 글이 안 써진다. 그래서 카페를 찾는데 코로나라도 크리스마스는 막을 수 없다. 가게마다 겨울을 막을 수 없어 눈이 온 것처럼 추위가 닥쳐도 트리에 불은 반짝인다. 갑자기 번쩍거리는 조명이 너무 어색하다. 아이 둘 다 사춘기라 크리스마스트리 로망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돈이면 차라리 치킨을 사주는 게 낫다. 낭만이라고는 필요 없는 가족 생애 주기 한가운데 있다.



크리스마스 조명을 말하는 이유는 아무 빛이 번쩍거리고 큰 이벤트로 거리라 떠들썩해도 나는 망부석보다 건조하다. 오로지 마감, 원고 쓰기, 출간한 책의 판매 현황과 홍보 관련 작업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트리 조명을 쳐다보며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멍해진다. 나는 글을 쓰다가 책을 쓰게 되었고 그리고 연이어 계속 쓰고 있다. 앞으로 기획하는 여러 가지를 투고로 보내든, 운이 좋으면 기획제안을 받든, 자가출판이든 텀블벅으로 펀딩을 받든 어떻게든 출간할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느냐는 목표를 잊은 지 오래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건너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생산활동 중 하나다.



2020년 초 설에도 원고를 쓰느라 마음이 쏠려있었다. 봄은 코로나가 할퀸 상처에 피가 흥건하듯 생업과 일상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봄에 대한 감상이 별로 없다. 예전 같으면 시집 한 권 채울 시를 썼겠건만, 봄을 느낄 새 없이 여름을 맞았다. 여름도 그랬다. 집이든 공방이든 종일 에어컨 아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가을에 정상화가 되는가 하며 콧구멍에 바람을 쐬며 한가함을 누릴까 하다가 기획 원고로 들어 원고를 쓴다는 핑계로 혼자 카페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추석도 반은 정신이 멍한 상태로 형님들이 하라는 것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일터에 아이들을 마주하고 오전과 밤에 남는 시간 원고를 썼다. 그리고 원고를 보냈고 목차 조정으로 의논하고 지금이다.



뭐하고 사는 것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런 관조적이면서 비관적인 듯한 문장 속에 사실 설렘과 대견함을 깔고 있다. 썩 나쁘지만 않다. 평생 처음으로 겪는 작가다운 패턴으로 겨울을 맞고 있는 것만 같다. 대작을 쓰는 작가들의 삶은 어떨까? 닥치는 마감이 일상이 된 글쟁이들의 일상은 나보다 더 정돈되지 않을까? 계절을 향유하고 이벤트가 있는 날은 그냥 넘기지 않고 원고 따윈 덮어버리고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하지 않을까? 나의 일상이 너무 뻔하고 무미건조하다. 글을 쓰는 나는 새롭고 샘솟지만 일상의 흐름으로 보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할 것만 같다. 아이들은 자신의 흥미를 따라 바빠서 엄마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몰두했는데 아이들이 어리다면 어리광을 받아주고 체험학습이라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야 할 텐데 자기 시간과 공간을 원하는 정도로 자란 게 뜻이 아닐까? 이럴 때면 내가 글을 쓴다는 이 길을 늦게 발견한 것에 감사한다. 무미건조한 엄마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다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나의 쓰는 라이프스타일에 매우 만족한 눈치다. 더 이상 엄마, 아빠를 노래하고 꽁무니를 쫓지 않는다. 되려 귀찮아한다. 나에게는 글쓰기에 적기다. 이럴 때 대개 주부들은 외로움, 소외, 허탈감이나 효능감의 상실로 우울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다.



'조명이 반짝반짝, 번쩍번쩍 아무리 해봐라 내가 꿈쩍 하나. 나에게는 다시 손봐야 할 원고가 넘치거든.' 흥이 나는 마음 주체하지 못해 밤바다라도 가고 싶은 마음은 일도 없다. 단 하나의 의욕만 가진 것 같다. 설마 평생 이러는 것은 아닐 거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올해, 내년만 이러면 되겠다 생각하고 입꼬리 한쪽을 올린다. 내게 이런 날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단, 너무 오래 이러지는 않기를. 앞으로는 책 쓰기의 노하우가 쌓인 능력자가 되어 글쓰기와 일상을 딱딱 자로 잰 듯 나뉘어 살 수도 있겠지. 지금은 초보니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이런 쓰는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누리자고 마음을 다짐했다. 늘 마음속에 돌덩어리 몇 개씩 있는 기분을 책상 앞에 앉아있는 방법 말고 해소하는 법을 잘 모르는 나는 초보다. 올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지나가겠다. 내년은 조금 더 노련해지겠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작업실이자 생업의 터인 공방이 있지만 글은 잘 안 써진다. 집은 따뜻하지만 아이 둘이 나의 자유시간을 사용하길 강요한다. 그리고 널브러져 글이 안 써진다. 그래서 카페를 찾는데 코로나라도 크리스마스는 막을 수 없다. 가게마다 겨울을 막을 수 없어 눈이 온 것처럼 추위가 닥쳐도 트리에 불은 반짝인다. 갑자기 번쩍거리는 조명이 너무 어색하다. 아이 둘 다 사춘기라 크리스마스트리 로망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 돈이면 차라리 치킨을 사주는 게 낫다. 낭만이라고는 필요 없는 가족 생애 주기 한가운데 있다.



크리스마스 조명을 말하는 이유는 아무 빛이 번쩍거리고 큰 이벤트로 거리라 떠들썩해도 나는 망부석보다 건조하다. 오로지 마감, 원고 쓰기, 출간한 책의 판매 현황과 홍보 관련 작업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 트리 조명을 쳐다보며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멍해진다. 나는 글을 쓰다가 책을 쓰게 되었고 그리고 연이어 계속 쓰고 있다. 앞으로 기획하는 여러 가지를 투고로 내든, 운이 좋으면 기획제안을 받든, 자가출판이든 텀블벅으로 펀딩을 받든 어떻게든 출간할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느냐는 목표를 잊은 지 오래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건너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생산활동 중 하나다.



2020년 초 설에도 원고를 쓰느라 마음이 쏠려있었다. 봄은 코로나가 할퀸 상처에 피가 흥건하듯 생업과 일상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봄에 대한 감상이 별로 없다. 예전 같으면 시집 한 권 채울 시를 썼겠건만, 봄을 느낄 새 없이 여름을 맞았다. 여름도 그랬다. 집이든 공방이든 종일 에어컨 아래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가을에 정상화가 되는가 하며 콧구멍에 바람을 쐬며 한가함을 누릴까 하다가 기획 원고로 들어 원고를 쓴다는 핑계로 혼자 카페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추석도 반은 정신이 멍한 상태로 형님들이 하라는 것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일터에 아이들을 마주하고 오전과 밤에 남는 시간 원고를 썼다. 그리고 원고를 보냈고 목차 조정으로 의논하고 지금이다.



뭐하고 사는 것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런 관조적이면서 비관적인 듯한 문장 속에 사실 설렘과 대견함을 깔고 있다. 썩 나쁘지만 않다. 평생 처음으로 겪는 작가다운 패턴으로 겨울을 맞고 있는 것만 같다. 대작을 쓰는 작가들의 삶은 어떨까? 닥치는 마감이 일상이 된 글쟁이들의 일상은 나보다 더 정돈되지 않을까? 계절을 향유하고 이벤트가 있는 날은 그냥 넘기지 않고 원고 따윈 덮어버리고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하지 않을까? 나의 일상이 너무 뻔하고 무미건조하다. 글을 쓰는 나는 새롭고 샘솟지만 일상의 흐름으로 보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할 것만 같다. 아이들은 자신의 흥미를 따라 바빠서 엄마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몰두했는데 아이들이 어리다면 어리광을 받아주고 체험학습이라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야 할 텐데 자기 시간과 공간을 원하는 정도로 자란 게 뜻이 아닐까? 이럴 때면 내가 글을 쓴다는 이 길을 늦게 발견한 것에 감사한다. 무미건조한 엄마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다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나의 쓰는 라이프스타일에 매우 만족한 눈치다. 더 이상 엄마, 아빠를 노래하고 꽁무니를 쫓지 않는다. 되려 귀찮아한다. 나에게는 글쓰기에 적기다. 이럴 때 대개 주부들은 외로움, 소외, 허탈감이나 효능감의 상실로 우울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다.



'조명이 반짝반짝, 번쩍번쩍 아무리 해봐라 내가 꿈쩍 하나. 나에게는 다시 손봐야 할 원고가 넘치거든.' 흥이 나는 마음 주체하지 못해 밤바다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일도 없다. 설마 평생 이러는 것은 아닐 거라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올해, 내년만 이러면 되겠다 생각하고 입꼬리 한쪽을 올린다. 내게 이런 날이 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단, 너무 오래 이러지는 않기를. 앞으로는 책 쓰기의 노하우가 쌓인 능력자가 되어 글쓰기와 일상을 딱딱 자로 잰 듯 나뉘어 살 수도 있겠지. 지금은 초보니까,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이런 쓰는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누리자고 마음을 다짐했다. 늘 마음속에 돌덩어리 몇 개씩 있는 기분을 책상 앞에 앉아있는 방법 말고 해소하는 법을 잘 모르는 나는 초보다. 올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지나가겠다. 내년은 조금 더 노련해지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와 저자, 어디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