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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애 Jul 07. 2021

쓸데없는 다정함이 나빴네

잠시 다정하지 않을래요.

"비가 쏟아지니 조리를 신거나 아예 운동화를 신어, 그리고 교실 가면 추우니까 바람막이 점퍼 입을래?"

분명 아이 뒷덜미를 보고 말했건만 아이는 무반응으로 뛰어 나갔다. 이내 예감이 적중하듯 전화가 왔다.

"엄마, 나 슬리퍼 같은 운동화 때문에 양말 젖었어, 힝~"


'그러게 엄마 말을 똥으로 듣지 말라했지'라고 말할 뻔했다. 얼굴에 친절이란 마스크를 "윙~치키"쓰고서 현관을 열었다. 운동화를 갈아 신는데 아이가 입이 댓 발은 나왔다. 내가 저를 젖게 한 것인 마냥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비 가 많 이 와 서 놀 랐 어 효?"


'비 때문에 네가 곤혹스러운 게 엄마 탓이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분명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아 속으로 삼켰다. 말을 삼키고 기분을 삼키고 표정에 마스크를 쓰기를 여러 해 연습 중이다. 처음에는 그 기교가 미숙해 가식적이었다면 이제는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갈 길이 멀다 느낄 때마다 다짐을 반복한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눈치 보는 게 아니라 배려하는 것이다.


아이에게 지는 게 아니라 아이의 수준에 맞추어 소통하려는 것이다.


어른의 권위를 잃는 게 아니라 아이도 한 인격임을, 그들의 감정까지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미숙한 감정조절과 객관적 인식이 성장하기까지, 갈등 발생요인이 부모가 되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이미지출처- 핀터레스트


이런 다짐은 어디서 베끼거나 하루아침에 작성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큰아이의 사춘기 앞에 서서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과 사색과 실전 전투로 얻은 것이다.


아이가 다급하게 현관을 닫자, 두꺼운 발자국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엄마라도 원망해야 감정이 가라앉겠다는 아이의 바닥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가는 모습이 창문 밖으로 저만치 보이는데 비가 '쏴쏴'하며 쏟아지는 것이었다. 장대비가 더 강렬해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집에서 도보로 학교까지 3~4분 거리임을 알면서도 차키로 손이 향했다. 아이 폰에 전화를 할 뻔했다. '엄마가 태워줄까?'라는 생각을 다시 삼켰다. 오늘 삼킨 것들로 배가 부를 지경이다. 삼키고서야 나의 쓸데없는 다정을 돌아보았다.


아이가 옷이 다 젖으면 어쩌나, 교실에서 에어컨 때문에 추우면 어쩌나?, 운동화마저 젖어 발이 찝찝하면 어쩌나? 우산대가 꽉 끼어 접을 때 힘들면 어쩌나? 선생님은 아이의 마음도 모르고 수업중 지적하면 어쩌나?


아이 곁에 가서 일일이 다 도와주고 싶은 속마음이 바글바글거렸다. 어릴 때가 떠올랐다. 우산이 귀하던 때, 오빠와 남동생이 가져가면 비를 맞고도 학교에 가던 내가 떠올랐다. 예쁜 장화를 신은 여자아이들이 부러워 젖은 운동화를 오래 쳐다보았었다. 교실에 들어가 엄지발가락까지 젖은 양말을 벗어 신발주머니 걸이에 걸어두면 솔솔 올라오던 살 냄새, 물 냄새, 발 냄새!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를 원망할 때가 많았다. 아침에 나를 먼저 챙겨줄 수 없는 엄마의 부재, 우산이 충분하지 않은 가난 의식, 신발이 젖은 불쾌와, 오빠와 남동생이 왜 있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지, 잡동사니 같은 원망을 누군가에게 하곤 했다. 자기중심적인 해석으로 빽빽하게 차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 우산이 뒤집어지거나 함께 놀던 친구들이 구멍 난 타이즈를 보며 놀릴 당혹감을 느꼈지만 스스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깨닫기도 했다. 불편과 불쾌, 적당한 결핍과 아이가 감당할 만한 당혹스러움은 생각의 힘을 길러준다. 어떻게 위기를 모면할지, 낯부끄러워질 때 어떤 행동과 말을 할지, 젖은 양말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혼자 더 생각하거나 친구들을 관찰하며 문제 해결을 시도하며 배운다.


나의 애착과 다정히 불쑥 올라올 때마다 아이를 앞서버렸다면 아이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고야 말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평소 느낄 미안함과 죄의식. 그것은 근거가 희박하고 '희생적이며 아이를 모두 살피는 좋은 엄마'라는 허상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더 잘하지 못하는 엄마, 더 살뜰히 챙길 수 없는 상황, 시간적 한계와 체력적 소모 앞에 널브러질 때가 많은 엄마인 게 아이를 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좋은 엄마'라는 기준이 비교에 의한 것이면 엄마를 더욱 옥죌 수밖에 없다. 오늘 아침 나의 쓸데없이 다정함을 헤집으며 보편적 기준에 굴하던 마음을 싹둑 자르기로 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은 것이다. 아니, 조금 부족한 것이 누구와 비교한 것인지를 알면 '부족하지 않음'을 인지하게 된다.


나는 참 좋은 엄마다. 아이 앞에 할리우드 액션을 거침없이 노련하게 해내는 수준에 이르러 아이를 덜 자극하는 게 어딘가. 아무리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그 앞에 화를 쏟아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그나마 조절하려고 애쓰며 아이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가끔 다정한 질문을 던지는 게 어딘가. 나는 참 좋은 엄마다. 나의 아이에게 참 좋은 엄마인 것이다. 더 다정하지 않기를 잘했다.

오늘도 장대비 사이를 가르며 아이는 웅덩이를 피하는 법, 젖은 옷을 처리하는 법을 찾을 것이다. 불쾌감을 이기고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며 감정을 조절하는 연습에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삐친 마음을 친구와 수다 한방에 날리는 법도 체득할 것이다. 당혹감을 느낄 상황이 많아질수록 아이는 점점 더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너른 우주를 마음껏 유영하는 아이가 되는데 나의 다정함은 잠심 꺼두어도 괜찮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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