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름에 쫌

지워진 일기장

유년의 여름 | by 키키

externalFile.jpg 그때 우리 집, 지금 모습

“여름!!”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쨍쨍한 불볕더위, 음습한 냄새가 콧가로 다가온다. 5살부터 19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우리 집은 여름이면 눅눅하고 물기 어린 냄새가 가득 배어있는 지하실이었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의 우리 집은 4계절 중에 가장 좋은 시절이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전기장판에 진종일 몸을 밀착시켜 누워있어야 하는 반면, 여름에는 따가운 더위를 피해 어둡고 시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게 오히려 좋았다. 단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실내와 밖의 온도 차이로 여름 내내 눅눅하고 차가운 집안의 벽에 등을 기대면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했다. 가끔은 닭살이 돋을 정도로 춥기도 했다.


externalFile (2).jpg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생긴 우리 집 대문


여름이면 위층에 살던 아파트 새댁들이 아이를 둘러업거나 손에 잡고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다. 시원하다고. 그 덕분에 엄마가 일이 없어서 집에 있는 날엔 우리 집의 누추함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꽃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은 온 집안이 곰팡이로 얼룩지고 벽지가 젖어서 뜯어지고 일어날 정도로 흥건했다. 물기 어린 이불에서 잠자고 일어나면 피로가 가시지 않았고 기분도 몹시 찝찝했다. 장마철은 빗줄기를 타고 내려온 지렁이들이 화장실에 즐비했다. 유독 환형동물을 멸시하고 징그러워하던 엄마는 그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쓰레받기에 그것들을 쓸어 담아 밖으로 멀리 던져버리곤 했다.


그때, 내 유년의 여름은 집안의 벽과 바닥만 눅눅함으로 물들인 게 아니었다. 습기가 내 유일한 비밀창고인 일기장에도 침투해서 수성펜으로 쓰인 글씨마다 형체를 잃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글을 쓸 때 수성펜을 쓰지 않는다. 예쁜 색상의 펜들은 모두 수성인데 참 안타깝다. 수성펜을 쓰지 못하는 유년의 서글픈 추억. 아주 큰 슬픔은 아니지만, 남들에겐 없는 내 안의 이런 사소한 상처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죽는 날까지 수성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리라. 나의 소중한 역사가 지워지는 일을 눈앞에서 본 이후 다시 그런 일이 생길까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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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집의 여름을 바라본다. 채광 좋은 베란다에는 빨래들이 널어져 있고 오전에 널어둔 빨래들은 반나절만 지나면 바짝 말라서 뽀송뽀송하다. 더위로 한층 올라간 집안의 온도는 에어컨이 쌩쌩 돌아 쾌적한 실내를 만든다. 너무 시원해서 이내 추워진다. 그것은 유년시절 느꼈던 눅눅하고 ‘습한 시원함’이 아닌 깔끔하고 ‘뽀송한 시원함’이다. 에어컨을 끄고 선풍기를 틀고 누우면 에어컨이 남겨놓은 냉기가 휘휘 돌아 기분을 환하게 해 준다.


나에겐 여름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없다. 교회에서 매년 여름수련회를 다녀오긴 했지만 그 속에서 특별히 각인된 추억은 없다. 내게는 여름이면 눅눅함과 서늘함 속에서 맞벌이로 바쁘던 부모님과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바쁜 남동생 덕분에 늘 혼자였던 유년의 시간들이 선명하다. 불 꺼진 집을 언제나 혼자 켜고 들어서야 했던 외롭고 서운한 마음들의 하루하루.


externalFile (3).jpg 2019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친정엄마, 불과 4년전 부모님의 모습^^


이젠 모든 게 변했지만 가끔은 그때의 나를 프레임에 담아 관찰해보고 싶어 진다. 어렸지만 의연하게 인내하면서 어두운 환경을 살아낸, 순수하고 외로웠던 유년의 내가 참 대견하다. 그리고 그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모든 헌신과 노력으로 굴곡의 삶을 인내한 부모님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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