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해야 끝이 난다

드로잉 에세이 <굴과 아이>, 문성식



긴 책의 구절 속에 이 카테고리가 나에게 그림책을 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주었기에 길지만 적어본다.

결국 그림도 글도 시작해야 끝이 난다.


망한 그림(p26~27)

1. 모든 작가들이 선망하는 그런 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되면 그 전시 공간에 대한 선입견이 부풀려진 만큼 작품도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럴 때면 지금 현재의 내 상태보다 나아 보이고 싶은 욕심이 나서 그림의 스케일이나 소재를 잘못 결정하게 되기도 한다. 이래야 할 것 같은 마음,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면서 그림을 그리는 본래의 동기는 오염되기 시작한다.

어떤 대상을 그릴 때 내가 흥미를 가진 사실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마땅하나, 그러지 못하고 그럴듯한 대상을 선택하고 그리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개념 같은 것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국 참고 그리면 그림을 완성하긴 해도 동기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불확실해져서 그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2. 오랜 시간 뜸을 들이기가 더 좋은 것을 그리려고 하다 보면 마음이 너무 소심해져서 겁먹은 상태가 된다. 이때는 빈 종이에 작은 티끌 하나만 보여도 신경이 쓰인다. 그저 그림을 보고 비난할 사람들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망칠까 두려운 마음은 아주 정성 들여 그려야 한다는 강박으로 연결되어,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먼 상태가 되고 만다. 그렇게 그린 그림에는 나약한 지루함이 흐른다. 그 에너지가 너무 약하고 확신이 없어서, 결국 그 그림을 완성할 만한 에너지를 생산해내지 못하고 못내 시들어버린다.

3. 그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그리는 나도 모를 때, 그림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그리는 에너지들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평평한 하나의 물건으로 변모한다. 정말 그 물건은 지구 상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흑백이라 아쉬웠던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에게 상상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주는 흑백의 미가 점점 안정감을 주었다. (유일하게 칼라로 표현된 말 없는 삶(p166)의 독수리와 질경이? 같은 그림은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굴과 아이의 굴을 먹는 굴로 착각했지만 몇 장 넘기지 않고 나왔던 동굴보다 더 진하게 표현된 호수 그림이 시원했던 형과 나(p16~17)와 거친 선에서 더욱더 극대화된 부드러움을 주었던 노인과 파리(p138~139), 그저 눈으로 보아도 모든 짐을 다 내려놓아 한 없이 가벼울 것 같은 어머니가 강조된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p142~142). 우리의 옛 추억을 끄집어낼 만한 과부의 집 (p31)에서부터 인생의 끝 작별(p146~147)까지.

어린 날의 추억과 내 주변의 사람들, 사랑, 사람의 혹은 인생의 고독과 죽음이 담겨 먹먹해지기도 또 일기처럼 차분히 써내려 간 글이 편안하게 책장을 덮을 수 있게 해 준다.


글이 그림을 이끌기도 하지만 그림은 글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림책은 글에서 가졌던 상상력을 앗아 갈 수 있지만 글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의미를 표현하기도 한다. 대상에 따라 독자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글의 양면성에 그림은 작자가 의도했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주어 편안하게 이끌어준다.

굴과 아이의 그림들은 작가가 직접 글과 그림을 그리므로해서 그러한 장점이 더욱 두드러진 책이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글로 상상하지 못했던 그림들로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까지 편안한 글 속에 긴장감으로 그림을 보게 했다.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준듯하다.


-웃는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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