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탐방 프로젝트 | by 하이디
우연한 기회에 작가와 함께 하는 일일 드로잉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썰렁해진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강의실에서 기다리니 초등학생, 청소년, 성인 등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열두엇 모였다. 살며시 들어온 정지윤 작가가 조곤조곤 오늘의 주제를 소개한다. 환경 보호 활동에 관심이 많은 작가는 멸종 위기 동식물 사진을 프린트해 왔다며 한 장씩 보여주었다. 그리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해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올빼미를 집어 들었다.
뾰족하게 깎인 새 연필과 지우개, 켄트지가 발린 나무 패널이 드로잉의 재료. 종이가 너무 깨끗해서 잠시 쓰다듬고만 있었다. 선 하나하나 조심히 그어야 할 것만 같은 순수함이다. 작가의 응원으로 종이에 흑연이 그어지는 소리가 공기를 채운다. 조용히 내리는 보슬비같이 기분 좋은 울림을 들으며 나의 올빼미에게도 사각사각 깃털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연필은 내가 어려워하는 그림 재료이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명암이 섬세한 연필화보다는 짧은 시간에 낙서하듯 펜으로 그리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약간은 도전하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신청했었다. 일련의 과정이 조심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또 간질간질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넘어 완성한 올빼미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는 위층 전시장으로 향했다.
와우. 일단은 감탄사부터 뱉고 시작하자. 1미터가 넘는 화폭에 흑연의 선과 결로 빼곡하게 채워진 그림을 발견한 순간, 어릴 때 했던 막연한 공상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멀리서 보고 부분을 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또 위로.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선마다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내 마음속에 아직 환상 동화가 남아있었나 보다. 기쁘게도.
줌인해서 들여다보면 아는 동물과 모르는 동물들이 섞여 있다. 인간과 요정과 정령도 돌아다닌다. 동양과 서양의 이야기가 만나 더욱 신비한 숲이 되었다. 더구나 이 모든 존재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곳이라니. 비현실적인 세계가 겹겹이 쌓인 밀도감으로 살아나 현실처럼 다가왔다.
맹그로브 숲을 나는 봉황 무리를 그린 작품은 또 다른 분위기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니 십장생을 모티브로 한 그림도 다수 보였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연출도 재미있었다. 그림들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섬세한 터치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야말로 도를 닦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6개월에서 1년도 걸린다고 한다.
저는 쌓임의 시간성을 강조하고 싶어요. 자연이 한순간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품고 있잖아요. 고목나무가 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것처럼, 선의 쌓임을 통해 시간성, 역사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무수히 많은 선을 그리며 정성을 쏟는 만큼, 진정성도 담을 수 있죠. - 작가 인터뷰글 중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조각났다고 아무렇게나 써버리지 말고 작은 시간들도 소중히 챙겨봐야지 문득 반성한다. 그룹전이라 정지윤 작가의 작품은 몇 점 못 보았지만 여느 전시회보다 충만함을 느끼며 전시장을 나섰다. 개인전이 열린다면 꼭 챙겨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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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동물 그리기의 좋은 점은 틀릴 수가 없다는 것.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