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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후 Nov 22. 2020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4 아는 것이 곧 사랑.


“나는 쉰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이제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나는 지금 고요와 쉼을 원한다. 아주 미묘한 내 소리를 듣게 된 것은 내가 이제 누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명랑하고 낙관적인 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말도 잘했고 주변에 친구들도 많았다. 늘 학교나 집단에서 리더를 맡았고 나의 생각을 분명하게 잘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렇게 몰려다니며 떠들썩한 것도 좋지만 정말로 말이 통하는 누군가와 앉아 도란도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해.”  




        

 하지만 난 내면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늘 ‘사교적이고 명랑하며 통솔력이 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학교에서 매번 반장을 맡았던 나. 어느 날 고2 때도 반장은 어김없이 내가 될 처지였다. 그러나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혼자 있고 싶어.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싫어.”


         

 


 나는 다음날부터 학교를 결석했고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이해해주셨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책을 읽으며 놀았다. 사흘째 되던 날 엄마와 전화를 나누던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학교 나와, 다른 사람 반장 시킬 테니까.”          




 하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그토록 원했고 꿈도 꾸지 못할 무단결석까지 해가며 얻어낸 자유였는데 왠지 모를 상실감과 공허함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봐도 그 결정은 잘하고 옳은 것이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성분은 나서고 드러나고 하는 것이 괴로운 사람이었다. 내 삶은 내 본질과 내 본질을 오해한 운명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리학 책을 통해서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의 구분을 알게 되었다. 즉, 에너지가 어디에서 축적되는가의 문제였다.          




 나는 내향적이고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을 필사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보니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고난이 심해질 때,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홀로 나 자신을 돌봄으로써 인생을 헤쳐 나온 일이 많았다.




              

책 [봉순이 언니]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한다. 소년은 그 말을 엄청나게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갑자기 종마가 병이 났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마는 소년의 간호에도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다리를 절게 되어버린다. 할아버지는 묻는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던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잠시 후 할아버지는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이 아이는 말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이 결국은 말을 아프게 만들었다. 왜냐면 자기의 기준으로 말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말이 진짜 원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모른 채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항상 나의 기준에서 상대를 맞추어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집착하고 구속하고 상대를 가둬놓는다.






 꽃을 사랑한다고 해서 물을 많이 줘버리면 잎이 변하고 뿌리가 숨을 못쉰다. 적당한 햇빛과 물의 양이 꽃을 더 시들지 않게 만들고 자랄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자신만의 행동들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좋아하는 것과 원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모른다. 그냥 내가 사랑해서 사랑하는 거지, 상대를 알려고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상대방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처음엔 좋을 수 있으나 결국은 저 말처럼 서로를 아프게 하거나 헤어지게 된다.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는 사랑만 중요했던 것이다. 진심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의 출발은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가? 내가 무엇을 할 때 정말로 행복하나?, 어떤 삶을 살아야 정말 나 자신을 사랑하고 성장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철저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한 사람만이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만큼, 딱 그만큼 남에게 대한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고민하고 생각해본 사람은 절대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철저히 고민하고 고뇌한 사람은 안다. 누구나 자기만의 각각의 ‘개성’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대방의 개성이 나의 개성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내가 어떨 때 행복하고 내가 성장하고 있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느낌이 드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나에게 맞을 수 없다.           






 누군가는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등에 땀이 흐를 만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누군가는 혼자 있고 조용한 삶이 행복하고 자기 자신에게 성장의 시간이 되지만 혼자 있는 게 지독히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삶이 맞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도 그 삶이 절대 맞을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삶과 가치관, 생각 등을 상대에게 강요한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자기 자신과 철저하게 마주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흔히 ‘그럴 수도 있다’라는 말은 무심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만큼 상대의 생각도 존중한다’라는 뜻이다. '상대의 생각도 맞을 수 있다. 내 생각만이 맞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내가 혼자 조용히 책 읽고 독서하고 음악 듣고 하는 삶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등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장과 나와 상관없이 더 잘됬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야 한다.





 그전에, 나를 먼저 아는 것, 그것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의 출발이다. 나를 제대로 알면 상대방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좋아하나? 무엇을 원하는가? 다른 사람 말이 말하는 것 말고,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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