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DUG와 야마시타 타츠로의 이하토보
가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재밌는 여행기를 만나게 된다. 특정 영화의 촬영지를 따라다닌다거나, 유명 아이돌의 단골집을 방문하는 여행기도 있다. 심지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된 곳을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해당 애니메이션의 장면과 비교하는 여행기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류의 여행을 일부러 꾸미지는 않는다. 사전 조사가 너무 많이 필요한 여행이니까... 흠... 그런데 가만히 되돌아보니, 이번 일본 여행은 [미스터 초밥왕] 덕분에 큐슈를 돌아다니게 됐고,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야쿠시마의 이끼의 숲도 방문했으니 나도 이미 그런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건가?
어쨌든 도쿄에서 특별한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배를 채워야 하고 술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 오게 마련이다. 가끔은 커피가 마렵기도 하고. 그럴 때 타베로그나 구글맵을 이용해 주변에 있는 가게를 찾아본다. 당연히 리뷰를 읽어보게 되는데...
그러다가 유명인의 이름이 눈에 띄는 리뷰가 있을 때가 있다. 물론 유명인이 직접 리뷰를 쓴 것은 아니고 유명한 사람이 예전에 자주 다녔던 가게래요~ 라는 리뷰 말이다. 신주쿠에서 가볍게 한잔하고 싶었을 때도 그랬다. 주변에 있는 바를 검색하고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자주 다녔던 바라는 곳이 있었다. 심지어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바라고 하니 찾아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게의 이름은 더그(DUG). 낮에는 카페로 오후 6:30 이후에는 입장료(테이블 차지)가 있는 바로 영업하는 곳이다. 낮에 커피를 마시러 가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떤 커피를 파는지는 모르겠다. 저녁에는 처음 방문하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이후 신주쿠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들렀다. 그래봤자 서너 번 정도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은 '바'로써 전문적인 곳은 아니다. 이곳의 장점은 말 그대로 '하루키가 단골'이었을 정도로 일본의 예술인들에게 유명한 곳이라는 것. 물론 까다로운 사람들에게 유명한 데에는 오래된 역사와 분위기, 좋은 음악 같은 것들이 이유였을 것이고, 유명인들이 모이다 보니 가게의 이벤트들은 특별해지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다시 이곳만의 역사를 만드는 선순환 같은 것도 일어났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2017년 당시는 아직 실내에서 흡연이 가능한 곳이 훨씬 많을 때였다. 최근, 특히 도쿄에는 실내 흡연이 가능한 가게들이 많이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쨌든 위의 사진들은 가볍게 마셨던 생맥주들. 오후 8시 까지던가? 해피아워로 맥주를 싸게 판매하는 시간이 있다.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가 마셨던 보드카 토닉. 사실 칵테일 베이스로 보드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행기에 이 말 한마디를 적기 위해서 시켰고, 찍었다.
좋아하는 칵테일인 올드 패션드. 바에 앉아 있어서 제조 과정을 지켜봤는데, 특이했던 기억이다. 얼음이 들어 있는 잔에 레몬과 라임 그리고 오렌지와 체리를 넣고, 비터를 뿌린 각설탕을 올리더니 거기에 그냥 버번을 부었다. '에? 이런 걸 그냥 준다고?' 하는 마음으로 의심하면서 마셨는데, 비터가 특별한 것이었을까? 말 그대로 깔끔한 올드 패션드의 맛이 나서 깜짝 놀랐다.
시모키타자와(下北沢)를 걷다가 말 그대로 '다리가 아파서' 좀 쉬고 싶은 때가 있었다. 역시 구글맵을 검색했고, 주변에 있는 가게 하나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유명인의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야마시타 타츠로(山下達郎). 일본 가수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다. 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해 아직도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는, 노장 가수. 굳이 우리나라의 가수와 비교하자면 김창완 정도를 들 수 있을까?
시모키타자와의 구석, 작은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카페의 이름은 이하토보(いーはとーぼ). 나이가 많은 마스터가 혼자 운영하는 정말 작은 카페 아니 다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이곳도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무명시절의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와 야마시타 타츠로가 자주 오던 곳이라고.
솔직히 일본에서 마셨던 커피 중에 실패한 커피는 없었다. 프랜차이즈 커피도 결코 가볍지 않고, 작은 카페에서 정성껏 내려주는 커피는 언제나 평균 이상. 이곳도 딱히 단점을 찾기 힘든 맛이었다. 그리고 커피보다 더 좋았던 것은 가게에 깔린 음악이 좋았다는 것.
그러고 보면 DUG도 이하토보도 둘 다 '음악'이 가게의 분위기에 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분위기의 가게들을 좋아하는 사람인가보다. (이런 생각으로 나를 은근슬쩍 그곳의 단골들과 비슷한 곳에 가져다 놓으려는 무의식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