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쿠, 가부키초, 고르덴가이
신주쿠(新宿), 시부야(渋谷), 하라주쿠(原宿) ... 도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지만 대충 이런 곳들이 번화한 곳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은 적이 있다. 사람 많고 네온사인 가득한, 뻔한 느낌의 번화가. 어떻게 생각해도 내 취향은 아니다. 비슷한 이유로 서울에서도 명동이나 강남역은 잘 가지 않는다. 일본 친구들이 서울에 왔을 때도 될 수 있으면 그런 동네는 추천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도쿄라는 도시에 처음 온 것이긴 해도 이런 번화가는 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일본 친구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명동을 함께 가자고 한다. 그들에겐 명동을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다. 결국 나도 신주쿠를 가야 하는(?) 이유가, 신기하게도 생기더라.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쇼핑. 조카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매장을 돌아다니며 눈으로 직접 보고 원하는 물건을 찾으려면 결국 큰 백화점과 쇼핑몰이 몰려있는 동네를 가야만 한다는 걸, 도쿄에 가기 전에는 몰랐다. 워낙 여행 중에 쇼핑을 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 외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는데, 도쿄에 사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다 보면 접근성이 좋다는 이유로 신주쿠에서 만나자고 하는 경우가 생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얼마든지 외진 골목을 찾아가는 모험을 할 용기도 있고 자신도 있는데, 그들이 나에게 과잉 배려(?)를 해준 탓이기도 하다.
한 번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는데 마침 회사가 근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를 그곳으로 잡았다. 오랜만에 고기를 먹자고 허름한 야끼니꾸 가게(구글맵을 보니 현재 문 닫은 듯)에서 만났다.
야끼니꾸(焼肉)라는 요리 자체가 한국식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식 소주의 위상도 예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어쩌면 도쿄는 훨씬 이전부터 이런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도쿄가 처음인 사람이니까. 커다란 이슬 잔에 일본의 소츄를 로꾸로 마시자니 뭔가 특이한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의 가게라면 당연히(?) 무료로 줄 것만 같은 야채류를 모두 주문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 집에서는 특이하게 대파를 따로 양념해둔 메뉴가 있길래 주문했다. 대파는 잘 구우면 단맛이 확 올라오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2차로 와인을 마시기 위해 바로 근처에 보이는 와인바로 입장. 마루고(マルゴ MARUGO)라는 곳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은 곳이었고 젊은이들에게 인기도 많은 곳인지 손님도 많았다.
일본은 술에 세금을 매기는 방식이 달라서 와인의 가격이 국내보다 저렴한 편인 데다가 수입하는 와인의 종류가 다양해서 평소 마시던 것과 다른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점도 일본 여행에서 와인을 마시는 이유 중의 하나인데, 사실 일본에서 와인을 마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바로 카타카나로 쓰여 있는 메뉴. 영어로 써주면 정말 감사하겠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식 발음의 카타카나로 써 놓는 가게들이 많다. 띄엄띄엄 카타카나를 읽는다고 해도, 마끄도나루도(맥도날드), 이기리시(잉글리시) 같은 일본식 발음이라 원어의 발음을 유추하기 쉽지 않은 데다가, 와인에는 불어나 스페인어도 많이 쓰이다 보니 절대 카타카나로 적힌 메뉴판을 보고 주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생산국이나 품종 정도를 알려주고 추천을 부탁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마다 꽤 훌륭한 와인을 추천해준다는 건,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아, 한 번은 아예 작정하고 신주쿠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찾아가려던 곳이 신주쿠에 있다는 걸 몰랐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어느 날 저녁 바에서 한잔하고 싶어 검색하다가 고르덴가이(ゴールデン街)라는 곳을 알게 됐다. 유명 드라마인 심야식당의 무대가 바로 이 동네를 참고했다고. 뭔가 재밌는 가게들이 있으려나? 싶어 찾아가 보니 신주쿠 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골목골목이 이어지는 곳이었는데, 골목 안에는 작은 바가 촘촘히 채워져 있는, 나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이 많은 바 중에서 어디를 가야 하지? 한 군데서 한 잔씩만 마셔보려 해도 며칠이 걸릴 것 같은 바 투어! 이미 유명한 거리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특히 많은 곳이었다. 아마 일본 여행 중에 외국인들을 가장 많이 만났던 곳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가장 많았던 곳은 압도적으로 야쿠시마屋久島와 미야지마宮島)
처음 들어갈 바를 정하기 위해 골목골목을 배회하고, 각 바의 요금정책(?)을 확인하고, 주류의 종류를 체크하면서 돌아다녀 보니... 모든 바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주류는 상상 가능한 정도. 맥주와 칵테일 그리고 약간의 스피릿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종류의 바, 와인을 주력으로 하는 바, 니혼슈나 소츄를 가지고 있는 바 정도로 크게 나눌 수 있었는데, 요금정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테이블 차지가 있는 대신 한 잔 한 잔의 가격이 좀 저렴한 바였고, 다른 하나는 테이블 차지가 없지만 한 잔 한 잔의 가격이 좀 비싼 바였다. 그리고 그 가격은 마치 상인회에서 결정한 다음 공지라도 하는 것처럼 똑같았다. 대부분 테이블 차지가 1,000엔/각 주류가 5~700엔이거나 테이블 차지가 없으면 각 주류가 1,000엔 정도. 가만히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한두 잔 마실 거면 테이블 차지가 없는 쪽이 낫고, 서너 잔 이상 마시려면 테이블 차지가 있는 쪽이 나은 가격이다.
가게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다들 '좁은' 가게라는 것, 그리고 '가격'이 통일되어 있다 보니 아예 튀는 가게는 거의 없다는 것. 비좁은 골목에 사람과 네온사인이 가득한, 바로 그 '골목'의 분위기가 특이하고 재밌을 뿐, 그 안의 가게들은 오히려 큰 관심을 끄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다니다가 마침 빈 좌석이 있는 와인바에 자리를 잡았다. 서너 잔은 마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찾은 테이블 차지가 있는 가게였다.
작은 가게에 혼자 앉아 있자니 금세 노신사 두 분이 들어오셨고, 조금 뒤에 외국인 한 명이 기타를 메고 들어와 앉더니 쥔장과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갑자기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음? 처음 듣는 나라의 말이다. 스페인어인가? 나중에 물어보니 브라질 노래라고 -0- 도쿄 한복판에서 난데없는 브라질의 음악이라니. 주인장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노래를 부르는 걸로 봐서 단순히 손님인 것 같지는 않았고 아마도 고용된(?) 가수인 것 같은 느낌.
뭐, 솔직히 말해서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는 곳이긴 한데, 바들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우연히 내가 찾았던 곳이 그런 곳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별로 흥이 오르지 않아서 바 투어는 중단하기로 했다. 그냥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
조카에게 선물할 책을 사느라 백화점과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 겸 맥주를 한잔하기 위해 가부키초 일번가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번화한 거리를 걸으며 혼자 한잔할만한 곳을 찾다가 서서 먹는 가게를 발견. 저렴한 곳일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다.
가게에 들어가면서 아차! 싶었다. 난 지금 '지친' 몸인데 서서 마시면 힘들겠구나 ㅠㅜ. 그렇다고 돌아 나가기엔 이 가게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혹시 좌석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2층에는 좌석이 있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는데, 우와! 싸다! 엄청 싸다! 80엔, 100엔짜리 오뎅과 꼬치가 보인다.
일부러 비싼 요리 - 그래 봐야 2~300엔 이지만 - 는 시키지 않고 80~100엔짜리로만 주문했다. 오뎅은 다이콘(大根 무)과 타마고(玉子 계란). 야끼도리는 카와(皮 닭껍질), 네기마(ねぎ間 대파와 닭다리살)를 먼저 주문하고 쿠시카츠로 자가이모(じゃが芋 감자)를 주문했다. 야끼도리를 모두 시오(소금) 소스로 주문했길래 나중에 레바(レバ 간)와 시시토우(ししとう 꽈리고추)를 타레 소스로 추가 주문. 이렇게 먹어봐야 (술값 제외하고) 700엔이 넘질 않는다니!
혼자 마신다는 것이 조금 쓸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저렴한 가게는 언제나 환영이다. 아, 맛에 대해서는 특별한 얘기를 할 게 없지만, 분명한 건 가성비가 아주 좋은 집인 것은 분명했다.
물론 이런 곳에서 혼자 먹어도 총비용은 훨씬 더 나온다. 보통의 경우 맥주나 소츄가 한 잔에 5~800엔 정도 하는데, 이걸 한 잔만 마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