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해맞이 여행 - [4부] 유유자적 구마모토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겐군마치를 뒤로하고 전차를 타고 스이도초(水道町駅)에 내려 다시 시내 번화가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어딜 갈까 잠깐 고민을 해봤는데 말 그대로 평범한 이자카야에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택한 곳은 며칠 전 미조마타 상, 츠노다 상과 함께 갔었던 타케나가(たけなが)입니다.
가게 오픈시간인 오후 5시에 바로 입장했는데요. 당연하게도(?) 테이블은 모두 예약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카운터석 세 자리는 모두 비어 있더라고요. 의도하지 않은 오픈런이라서 카운터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자마자 타케나가의 인기 메뉴인 카츠아지세토(活アジセット) 그러니까 활전갱이 세트를 주문합니다. 커다란 생맥주 한 잔과 어항에서 살아 헤엄치고 있는 전갱이 한 마리를 바로 잡아 이케즈쿠리를 만들어 주는데, 단돈 980엔!!
제가 자리에 앉고 나서 10분? 20분? 정도 지나자 카운터 자리가 모두 다 찼습니다. 신기하게 각자 혼자 온 손님 3명이 카운터에 앉아 있게 됐어요. 저 말고 다른 두 분은 여성분들이셨는데 단골손님들이시더라고요. 사장님이 지난번에 방문했던 저를 알아봐 주셔서 카운터 3인과 사장님 그리고 매니저님의 수다가 시작됐습니다.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본격적으로 쇼츄를 마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야키도리가 먹고 싶어서 가장 기본인 네기마(ネギま)를 주문. 야채 구이가 먹고 싶어서 야마이모 스테이크(山芋のステーキ)를 주문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냥 산마를 두껍게 잘라서 그대로 불에 구운, 그런 단순한 걸 생각했는데 막상 나온 음식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산마를 갈아서 계란과 육수를 섞은 다음 철판에 올려 그대로 구운 것 같아 보였어요. 그 위에 가츠오부시를 잔뜩 뿌려 주셨고요.
끝내주는 별미! 뭐 그런 맛은 아니었는데요. 부드럽고 촉촉하면서 자극적이지 않은 그런 평양냉면 같은 맛이었습니다. 문득 지금 사진을 보니 다시 먹고 싶어 지네요. 저걸 먹을 당시에는 그렇게 기억에 남는 맛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단골손님 중 한 분은 술을 한 잔도 안 드시고 말 그대로 식사만 하고 금방 돌아가셨고요. 다른 한 분은 아들이 캐나다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노조미 타구치 상이었는데요. 라인 친구를 맺고 구마모토에서 맛집이 궁금하면 물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타치노미(立ち飲み) 한 군데를 소개해주셨습니다. 타마야(タマヤ)라고 하는 가게였는데요. 혼자 가서 마시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나오는 재밌는 가게라고 하더군요. 아쉽게도 방문해보진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서 마시는 걸 좋아하지는 않거든요. 무릎이 아파요 ㅠㅜ
오늘 전차를 타고 겐군 마치 쪽으로 가면서 전차 안에 붙어 있던 광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30분에 1,000엔. 120 종류의 니혼슈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는 광고였어요. 바로 구글맵에 저장을 해두었죠. 2차로 니혼슈를 마시기 위해 바로 그 가게를 찾아갑니다. 가게 이름은 쿠라베(蔵辺). 3층까지 걸어서 올라가니까 정말 허름한 가게에 도착합니다.
처음 와본다고 했더니 가게의 시스템을 설명해 주시네요. 테이블 위에 포스트잇으로 시작 시간을 적어주고, 30분에 1,000엔이고 최대 3,000엔을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3,000엔에 무제한이라고 생각하면 더 적절하네요. 가게에서 주문할 수 있는 안주나 음식 같은 것은 없고, 직접 배달시키거나 사 오는 것은 된다고 합니다.
가게 한쪽에 다양한 모양의 잔이 놓여 있고, 직접 술을 따라 마시는 시스템. 사용한 잔은 싱크대에 가져다 두면 됩니다.
말 그대로 인건비, 인테리어비 등 부가 비용을 최대한 줄인 가게예요. '니혼슈 가져다 둘 테니 니들이 알아서 마셔'가 컨셉이랄까요.
시스템 설명을 듣고 나서 가게 한쪽의 문을 열고 니혼슈 보관방(?)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술을 보관하기 위해 서늘한 온도로 유지 중인 방이에요. 지금 대충 세어보니 120종까지는 안되고 7-80종류 정도 되네요. 이걸 마음껏 마셔도 된단 말이죠. 어차피 마시다 보면 30분 이상 필요할 테니 그냥 3,000엔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아, 세금을 포함하면 3,300엔입니다.
처음 마신 것은 레이블이 마음에 들었던 덴슈(田酒), 두 번째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아카부(AKABU)를 마셨는데 그냥 '아, 니혼슈구나' 싶은 정도의 느낌이었어요. 특별한 인상이나 느껴지는 맛이 없었달까?
세 번째 마신 텐구마이(天拘舞)는 확 다르더군요. 살짝 매운맛이 난다고 느껴질 만큼 강건하고 독특한 맛이 있었어요. 마음에 드는 맛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요.
술을 세 잔 마시고 나니 안주 거리가 필요해졌습니다. 하지만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은 좀 귀찮았어요. 마침 가게에 간단한 '안주 뽑기 챌린지'가 있더군요. 커다란 상자에 가벼운 과자들이 들어 있는데 300엔을 내고 한 주먹, 딱 한 주먹을 뽑을 수 있는 챌린지입니다. 단! 상자의 입구를 빠져나올 수 있을만큼 집어야 해요. 입구가 그리 크진 않거든요. 뭐, 저야 어차피 많이 뽑아봐야 다 먹지도 못할 거라서 그냥 조금만 뽑았습니다.
마침 점원분(사장님일까? 매니저일까? 알바일까? 그건 모르겠습니다)이 말을 걸어옵니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 전차 광고를 보고 왔다. 여행 중이냐? 그렇다. 왜 혼자 왔냐? 나중에 친구들이랑 오기 위해 분위기를 확인하러 왔다. 는 식의 대화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추천을 부탁드렸죠. 어떤 종류의 니혼슈를 좋아하냐고 물어보길래 향이 좋은 것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추천받은 네 번째 잔은 칸키쿠 메이조(寒菊銘醸)의 2024 special thanks 39.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칸키쿠 메이조라는 주조회사에서 39%의 정미율로 매년 만드는 특별 시리즈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향긋했어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니혼슈입니다.
다음으로 이제 이름을 아는 걸로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나베시마(鍋島) 야마타니시키(山田錦). 아, 역시는 역시네요. 저, 나베시마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아니, 좋아합니다. 앞서 마시던 것들보다 훨씬 좋은 술이라는 느낌이 빡 옵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나베시마를 다시 한 잔 마십니다. 나베시마(鍋島) 토쿠베츠준마이(特別純米酒) 나마자케(生酒). 확실히 나베시마는 나베시마입니다. 뭘 마셔도 맛있어요.
제가 니혼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마시다 보면 금방 질린다'는 거거든요. 뒤끝도 별로 안 좋고요. 벌써 여섯 잔을 마셨더니 슬슬 질립니다. 오늘 밤을 이곳에서 끝낼 것은 아니니까 무리해서는 안되죠.
마지막 잔으로 치에비진(ちえびじん) 야마타니시키(山田錦) 준마이긴조(純米吟醸)를 선택했습니다. 기분 좋은 향이 느껴지는 술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뭔가 탁! 하고 쏘는 맛이 있더군요.
여기까지 마시고 그만 일어설까 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 가게 쥔장이 직접 만든 수제 파인애플주가 있길래 입가심으로 한 잔 마셨습니다. 달콤한 맛으로 마지막을 정리해 주기에 딱 좋은 선택!
주종을 바꾸기 위해 와인을 마시고 싶어 졌어요. 그래서 이와사키 슈퍼 근처의 와인 노미호다이에 가볼까 했거든요? 헌데 방금 니혼슈 노미호다이에 다녀왔잖아요. 그리고 거기서 좀 심심했거든요. 역시 노미호다이는 왁자지껄 여럿이서 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 방문했던 적이 있는 와인바 아라보(a' la veau)에 다시 들렀습니다. 역시 혼자서 마실 때는 '바'가 좋습니다. 마스터랑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언제나처럼 시작은 스파클링입니다. 오토시로 내주신 파테(?)가 너무 맛있어서 이거 아예 한 접시 주실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빵이랑 같이 듬뿍 퍼주셨어요. 그리고 배가 고팠는지 생햄도 주문했습니다.
스파클링에 이어 레드 와인을 마셨습니다. 세 병을 보여주고, 작은 잔에 모두 맛본 다음, 그중 하나를 고르는 재밌는 시스템.
이번에 선택한 두 번째 잔은 남아공의 피노타쥬였습니다. 남아공의 와인도 어느새 이 정도 수준까지 올라왔군요. 마음에 드는 와인이었습니다. 병에 붙어 있는 각종 메달 스티커가 납득되는 퀄리티.
세 번째 잔은 지난번 왔을 때도 마셨던 미국의 까쇼+메를로 블렌딩. 취향이라는 건 별로 변하지 않는 건가 봅니다.
저렴한 가게에서 겨우 와인 세 잔 마셨는데 일어설 때 가격이 좀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안주를 두 개나 주문했군요.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곳. 바 키키(kiki)를 가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구글맵에 저장해 둔 위치에 왔는데... 어라? 분명히 구글맵에는 1층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도의 위치에 키키라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 기억에는 분명히 엘리베이터를 탔었는데?
그래서 근처 건물들을 뒤져보니 3층에 있더군요. 그래서 구글맵에 수정 요청을 보내두었습니다. 저처럼 또 헤매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사진을 하나도 못 찍었지만 닷소 한 잔을 마시면서 옆자리의 응급구조사 아저씨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피곤했던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길래 정말 딱 한 잔만 마시고 일어섰어요.
해장을 위해 아카구미(赤組)에 가고 싶지만 오후 11:30에 영업 종료라 이제는 갈 수가 없다고 한탄을 했더니 이치란(一蘭)은 24시간이니까 거길 가보라고 하더군요. 하아... 이치란. 저 거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어쩝니까, 새벽 늦은 시간에 돈코츠 + 호소멘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고 하는 걸. 그래서 진짜 오랜만에 이치란을 방문했습니다. 특별한 주문은 없고 그냥 카타멘 정도를 체크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면이 카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예 바리카타로 주문해야 제가 좋아하는 면상태가 되려나요.
음... 예전에 후쿠오카에서 새벽에 이치란을 먹고 너무너무 실망해서 다시는 안 먹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국물이 너무 가볍고 싱거워서 하카타 라멘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럽다는 게 이유였는데요. 솔직히 이날의 이치란은... 뭐 그냥저냥 먹을만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익힘이 아닌 면을 제외하면, 새벽 해장으로 먹을만했어요.
아, 역시 니혼슈를 마시면 뒤끝이 안 좋습니다. 집까지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길에 보이는 택시를 하나 잡아 탔습니다. 하치만구 앞까지 딱 1,000엔이 나오네요.
오늘 밤은 아주 잘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