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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34. 완행열차, 바다, 미스미항

2025 새해맞이 여행 - [4부] 유유자적 구마모토

by zzoos



큐슈(九州)는 커다란 섬입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활화산인 아소산(阿蘇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큐슈의 도시들은 대부분 바다 근처에 있죠. 후쿠오카(福岡)는 물론이고 나가사키(長崎)에서도 조금만 걸으면 바다를 바로 볼 수 있고, 가고시마(鹿児島), 미야자키(宮崎) 등 대부분의 도시에서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헌데 구마모토(熊本)는 조금 상황이 달라요. 사실 바다를 가지고 있긴 한데 아리아케 해(有明海)는 내해(內海)이기도 하고 구마모토 시내는 바닷가에서 좀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시에서 바다의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거리상으로는 바다보다 아소산이 더 먼데도 불구하고 구마모토의 느낌은 아소산과 더 가깝죠.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어쨌든 바다가 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구마모토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바다들을 좀 찾아봤어요.


가고시마 본선(鹿児島本線)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야쓰시로(八代)에 갈 수 있더군요. 거기엔 야쓰시로 시립박물관 미래의 숲 뮤지엄(八代市立博物館未来の森ミュージアム)이 있더라고요. 역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토 토요의 작품입니다.


다른 기차는 뭐가 있을까? 하고 구마모토 친구들에게 추천받은 아마쿠사(天草) - 친구들 왈, 경치도 좋고 맛있는 음식도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통이 영 불편한 동네네요. - 방면으로 지도를 좀 보니 바다를 건너 섬까지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미스미선(三角線)을 타고 미스미역(三角駅)까지는 갈 수 있더라고요. 거기에도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인 건물이 있습니다. 바다의 피라미드(海のピラミッド). 요 쇼에이의 작품이네요.


그 외에도 히고나가하마역(肥後長浜駅), 오다역(網田駅), 아카세역(赤瀬駅) 등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싶긴 했는데, 구글맵으로 사진들을 좀 살펴보니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최종적으로 제 마음에 든 곳은 미스미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미스미에 갈 계획입니다. 체력 보강을 위해 어제 술도 안 마시고 평소보다 일찍 잠을 청했습니다. 덕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아침 루틴(샤워, 화장실, 청소 등)을 마치고 나서 구글로 검색을 좀 해보니 기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군요.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려면 11시 정도의 기차를 타면 될 것 같은데, 기차 시간표를 보니 9시 57분 기차가 있고 그다음 기차가 11시 30분입니다. 흠, 너무 일찍 움직이면 미스미에 가서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11시 30분 기차를 타기로 합니다.


그럼 어제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까지 일찍 일어나기 위한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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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역 5번 플랫폼에서 미스미선을 탈 수 있었다.



집 앞에서 구마모토역까지는 버스를 한 번 타면 됩니다. 버스비는 290엔. 11시 30분 출발 기차입니다. 이번에 타는 기차는 JR이니까 전국 공용 교통카드가 됩니다. 아이폰의 애플 지갑에 넣어둔 ICOCA 카드를 찍고 탑승했습니다. 아, 이 편한 것을 다 같이 쓰지 않고 왜 구마모토만 독자적인 규격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낡은 기차의 뿌연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스미요시역(住吉駅)을 지나면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시끄럽고 덜컹거리는 기차는 말 그대로 완행열차였어요. 시간 때문인지 원래 그런 노선인 건지 모르겠지만, 기차 안에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는 아무런 안내를 해주지 않네요. 오로지 일본어만 방송합니다. 정말 시골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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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미선에서는 ICOCA 카드를 쓸 수 없었다.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보다가 뭔가 교통 IC 카드에 대한 안내가 적혀 있는 것 같아서 사진을 찍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아뿔싸. 교통 IC 카드를 모든 구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제가 가려고 하는 미스미 역은 교통 IC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이네요.


결국 미스미역에 내리면서 개찰구를 지날 때 역무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구마모토역에서 ICOCA 카드를 찍고 탔다고 했더니,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익숙하다는 느낌으로 '서류를 하나 써줄 테니 나중에 구마모토역에 가면 탑승 기록을 취소해 줄 거다. 지금 여기서는 현금으로 계산하면 된다.'라고 해서 역무원에게 현금으로 760엔을 결제하고 작은 종이 서류(?)를 하나 받았습니다. 나중에 구마모토역에서 이걸 보여주니 아이폰을 가져가서 ICOCA 카드에 기록된 탑승 기록을 취소해 주더군요.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가 좋고 깔끔한 미스미 역. 관광 안내소도 있다.



미스미역은 의외로 분위기가 좋은 역이었습니다. 작고 낡은 시골 역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의외였어요. 그리고 역사 한편에는 관광 안내소가 있을 정도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역인가 봅니다.


저도 일단 안내소에 들러 주변 관광 정보를 확인해 봤습니다. 관광 안내소에서는 뻔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거든요. 계획 같은 거 없이 돌아다니는 저의 여행 스타일에 큰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안내소에서 주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세계 문화 유산과 미스미 서항(三角西港) 구역이었어요. 그래서 미스미 서항의 관광 지도를 한 장 챙겨서 역 앞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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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2_1_10.png 처음 먹어보는 아마쿠사 짬뽕. 맛있었다.



12시가 넘었으니 바로 점심을 먹어야죠. 기차를 타고 오면서 찾아둔 식당은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 바닷가니까 카이센동(海鮮丼) 같은 걸 먹으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미스미역 앞은 10분이나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리의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온통 공장이나 창고 같은 것이 즐비한 말 그대로 항구였어요. 왕복 20분이나 걷고 싶은 도로가 아니에요.


그래서 역 바로 앞에 있는 짬뽕집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마쿠사 짬뽕 치란(天草ちゃんぽん 千蘭). 구글 4.4 , 타베로그 3.32. 자리에 앉자마자 아마쿠사 짬뽕을 주문했고, 금방 만들어 주셨어요. 해산물 건더기가 듬뿍 들어 있다거나 큼직한 고기 건더기가 들어있거나 하는 짬뽕은 아닙니다. 양배추와 숙주가 잔뜩 들었고 어묵을 잘게 자른 고명이 올라가 있습니다. 보기에 대단한 비쥬얼은 아닌데, 국물이 아주 깊습니다. 결론적으로 맛있었어요. 추천할만합니다.



미스미 역 바로 앞의 광장. 그리고 우미노 피라미드.



점심을 먹고 나와서 역 앞의 공원을 구경합니다. 한 여름에 오면 잔디가 파래서 멋진 사진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공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를 미스미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우미노 피라미드(海のピラミッド)를 볼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밖에서 봤을 때, 아니 뭐 저런 구조물을 굳이 바닷가에 지어놨지? 하는, 그런 이질감과 촌스러움과 뭐 그런 느낌들이 복합적으로 드는 건물이었거든요?





하지만 건물 안에 들어와서 보니 압도적인 조형미와 구조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구조물이었어요. 삼각형, 원형, 스파이럴. 조형적으로 힘이 강한 단어들이 잘 조화되어 자신만의 분위기를 뿜뿜하고 있었습니다.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요.





구조물의 중앙에는 아무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습니다. 한 곡이라도 외워서 칠 수 있는 노래가 있다면 연주하고 싶은 공간이었어요.


내부에도 스파이럴 램프가 있듯이 외부에도 스파이럴 램프가 있습니다. 내부에서 올라가다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외부에서 올라갈 수도 있고, 외부에서 내려오다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서 내부에서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피라미드의 정상에 올라가면 또 내부와는 다른 의미로 강한 인상을 주는 꼭짓점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단순 명쾌한 어법의 구조물이에요. 매력적입니다.



관광을 위한 항구라기보다는 작은 지방 도시의 물류 항구 같은 느낌이 드는 미스미 항



피라미드에 올라서서 외부의 램프를 따라 미스미 항구를 둘러볼 수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항구는 '관광'을 위한 항구는 아니네요.



우미노 피라미드 주변에 놓여 있는, 머릿돌(?)



원래의 계획은 미스미항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었는데요. 아무래도 이곳은 우미노 피라미드 말고 더 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그 얘긴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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