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해맞이 여행 - [4부] 유유자적 구마모토
드디어 내일 귀국입니다. 오늘이 구마모토 생활의 마지막 날이에요. 2024년에 출발해 2025년에 돌아가는 연말연시의 한 달 여행입니다. 오늘 저녁 6시에는 바 KiKi의 아이 상이랑 약속이 있어요. 그렇다면 점심에는 뭘 하면 좋을까요?
일단은 점심을 먹어야겠습니다. 집 앞의 코카이 상점가(子飼商店街)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인 fasola에서 런치 세트를 먹기로 합니다. 슈퍼마켓을 왔다 갔다 하면서 눈여겨봤던 식당인데 그동안 한 번도 들르지 못하다가 마지막 날에서야 가보네요.
fasola. 파솔라? 도레미파솔라시도 할 때의 그 파솔라일까요?
밖에서 보던 것과 내부는 분위기가 좀 달랐습니다. 지나다니면서 봤을 땐 가벼운 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훨씬 더 본격적인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주방에 놓인 각종 무쇠팬과 스텐팬들이라거나 구석에 보이는 말코닉 그라인더 같은 것들을 보고, 조금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런치 세트를 주문했더니 두 종류의 파스타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하더라고요. 벽을 가리키며 칠판에 적힌 것 중 고르면 된다고 했지만 어차피 카타카나로 적힌 이탈리아 음식의 이름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그냥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추천해 줬습니다.
그리고 먼저 나온 샐러드 접시. 솔직히 단순한 야채샐러드를 생각했는데요. 어라? 꽤나 마음에 드는 샐러드입니다. 부드러운 바게트빵에 발린 빠테는 육향이 확 느껴질 정도로 진했고요. 스페인산 생햄은 잡내 없이 고소했어요. 당근 라페와 양배추 라페(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신선하면서도 질긴 맛이 없어서 좋았어요.
어라? 이런 샐러드 접시를 앞에 두고 와인을 안 마실 수 없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글라스 와인으로 화이트를 한 잔 부탁드렸습니다. 남프랑스 랑그독 지역의 리즐링 블렌딩이라고 설명해 주시면서 Mas Vres Stella를 한 잔 주십니다. 와인 셀렉팅도 괜찮네요. 비싸지 않지만 마시기 편안하면서 상큼합니다.
샐러드 접시가 비워지는 속도를 유심히 보면서 파스타를 만드는 속도를 조절하시더니 샐러드를 다 먹으니까 파스타가 딱! 나옵니다. 직접 만든 미트볼(?)이 들어 있는 토마토소스의 파스타입니다. 토마토소스를 쓰긴 썼는데 아주 약하게만 사용하고 오히려 고기 육수가 더 진하게 느껴지는 특이한 스타일의 파스타였어요.
여기에 맞춰서 레드 와인도 한 잔 부탁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랑게의 네비올로네요. 서빙하면서 온도가 너무 낮아 미안하다고 합니다. 네, 정말로 온도가 좀 낮아서 향이 잘 느껴지진 않았지만 마시기 딱 좋은 네비올로였어요.
식사를 마치니까 커피를 내주십니다. 처음 주문할 때 모두 함께 주문했어요. 커피 원두는 세 종류가 있었는데 저는 에티오피아로 골랐습니다. 말코닉 그라인더로 바로 갈아서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시는 줄 알았다면, 온도가 낮게 서빙되는 와인을 마시게 될 줄 알았다면 굳이 아이스커피로 주문하지 않았을 텐데...
커피도 아주 좋았어요. 남편은 요리를 부인은 커피와 와인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아주 친절하게 운영하고 있는 작지만 좋은 가게였습니다. 이곳을 미리 알았다면 저녁때 와서 와인을 좀 제대로 마셔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곳입니다.
점심을 먹고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달 동안 걸어 다녔던 코카이 상점가. 이 풍경을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다시 한 장 찍어둡니다. 아, 저기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은 카라오노카라아게(から王の唐揚げ)라는 카라아게 도시락 전문점입니다. 100g 단위로 카라아게를 파는데 가격이 아주 저렴합니다. 아마 100g에 180엔이었던가? 하여간 저렴하고 맛도 좋은 곳인지 점심시간마다 길게 줄이 늘어섭니다.
점심을 먹고 뭘 할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오늘도 니노마루(二の丸広場)를 향해 걸어갑니다. 가는 길에 독특한 디자인의 주택들이 유난히 눈에 띄네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자주 보던 것들도 새롭습니다. 괜히 사진도 더 찍게 되고요.
한 여름에 오면 넓은 니노마루 광장에 파란 잔디가 가득하려나요? 그러고 보니 한겨울인데도 푸르른 나무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록수라고 하면 소나무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구마모토의 상록수는 침엽수가 아니라 활엽수인가 봅니다.
항상 앉던 벤치에 앉아서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몇 번의 포스팅에 계속해서 하는 말인데요. 정말 '가장 구마모토스러운 풍경'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풍경과 이 분위기를 깊숙하게 새겨 놓기 위해 최근 며칠의 시간을 계속 여기서 보내고 있는 거예요.
한겨울인데도 푸른 나무가 가득한 광장. 멀리 보이는 천수각(의 사진 ㅠㅜ). 한가롭게 걷거나 달리고 있는 사람들. 캐치볼 하는 가족. 아장아장 겨우 뛰기 시작한 꼬맹이와 그 뒤를 걱정스러운 손과 귀여운 눈으로 따라가는 할머니.
약속 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좀 미리 싸둬야겠습니다. 오늘 밤에 술을 마시게 될 텐데 혹시라도 과음하게 되면 짐을 쌀 시간이 없어지니까요.
내려가는 길에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가토 신사(加藤神社)에 잠깐 들렀습니다. 천수각에 들어갈 수 없는 지금 유일하게 천수각의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있는 스팟이 있는 곳입니다.
어? 여기에 이게 계속 있었나? 문득 눈에 들어온 신사 사무소 앞의 쿠마몬들. 다양한 쿠마몬을 봤지만 다루마(달마대사) 모양을 한 쿠마몬은 처음 본 것 같네요. 그리고 가토기요마사의 갑옷을 입은 것 같은 쿠마몬도 늠름하게 서 있어요.
하치만구를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매일 걷던 길이지만 오늘은 사진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마모토 시립 세키다이 소학교(立碩台小学校)는 집 바로 앞에 있는 학교입니다. 하교하는 학생들도 많이 만났어요. 학교 옆의 주차장에는 쓰레기 보관 장소가 있고요. 전봇대가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바로 숙소 건물입니다.
집에 들어가서 짐을 70% 정도 싸두었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사용하고 나서 넣어야 하는 짐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 밤 100%의 짐을 싸둘 수는 없어요.
오늘 저녁은 KiKi의 아이 상과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뭘 먹고 싶냐고 하길래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으니 추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미리 예약을 해둔, 아이 상의 추천 가게입니다. 비어홀맨(ビアホールMAN). 아마 구마모토에서 가장 유명한 가게일 거라고 합니다.
일단 가게를 둘러보면 굉장히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가게에 꽉! 들어찬 프로레슬링. 일본에서는 아직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살아 있다고 하네요. 이곳은 쥔장이 프로레슬링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실제로 프로레슬러들이 자주 찾는 집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가게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쥔장 할아버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올해로 91세가 되셨다는 무라타 상. 술도 잘 드시고 목소리도 엄청 큽니다. 건배할 때마다 가게를 쩌렁쩌렁 울리는 링을 울리기도 하시고요. 사진에 찍힌 모습은 저희를 위해서 마술 공연을 해주시는 모습이에요. 분명히 가위로 자른 끈이 다시 이어진다니깐요!!
작년, 무라타 상의 90번째 생일에는 자그마치 250명이 호텔에 모여서 축하를 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구마모토의 축제였네요. 심지어 프로레슬링 상설 무대를 만들어서 공연까지 했다고 합니다. 촬영한 영상도 보여주셨어요. 장난 같은 무대가 아니라 정말 프로레슬링 무대더라고요.
아, 비어홀맨의 명함을 살펴보니 무라타 상은 매일 출근하시지는 않는 모양이네요. 금요일에만 나오시나 봅니다. 마침 오늘이 금요일이에요. 그래서 아이 상이 이곳을 오자고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주문한 것은 말고기 볶음(?)입니다. 잘게 자른 말고기를 대파를 잔뜩 넣어 함께 구웠어요. 말고기에 대한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어서 잘 안 먹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결국 여러 번 먹게 됐네요. 하지만 매번 맛이 괜찮았습니다.
지난번에 미조마타 상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바사시 그러니까 말고기 육회를 먹었었는데 나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오늘 먹은 말고기 구이(라기엔 볶음?)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아마도 그리 고급 고기는 아니었을 텐데도 냄새가 나거나 질기지 않았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좋은 고기를 제대로 구워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 아이 상이 알려줬는데, 말고기 샤브샤브도 있다고 하네요.
오징어 구이와 소세지도 먹었습니다. 식당이라기보다는 맥주집이었으니까 안주로 배를 채웁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얘기를 했더니 서비스로 김치도 주셨습니다. 저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서 잔뜩 먹을 예정인데 말이죠. ㅋㅋ
아,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피규어들은 모두 무라타 사장님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하시네요. 아주 유쾌한 분이십니다. 구마모토의 명물이라는 말이 이해가 됐어요.
비어홀맨을 나와서 바로 앞 건물의 KiKi로 이동했습니다. 어라? 무라타 상이 가게 앞까지 배웅해 주는 걸로도 모자라서 1층에 내렸을 때에도 4층에서 인사를 하고 계십니다. 와,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심지어 맞은편 건물에 들어가서 창문으로 인사를 할 때까지도 손을 흔들고 계시네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2차로 아이 상과 함께 KiKi로 돌아왔습니다. 아, 이런 게 동반출근인가요? 닷소와 쇼츄 등을 마시면서 구마모토의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은 ICOCA라는 바에서 미조마타 상을 만났기 때문이네요. 돌아가기 전에 인사는 해야겠어서 ICOCA에 들러 가볍게 한 잔 마셨습니다.
오늘은 금요일. 아카구미(赤組)가 새벽까지 영업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밤의 해장도 아카구미로 결정했어요.
바로 그 조합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아지타마 라멘, 야끼 교자 그리고 쇼츄!! 그렇게 원하던 조합을 결국 마지막날 밤에 먹어 보는군요. 쇼츄 한 모금 마시고 진한 국물 한 모금 마시는 건 정말 좋더라고요.
그리고 오늘은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물어봤습니다. 카타멘으로 주문할 수 있나요? 라고.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라멘의 만족도도 더욱 높았습니다. 진즉에 물어보고 계속 카타멘으로 먹을 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니꾸망과 피짜망을 사서 먹어 치우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네, 마지막 밤입니다. 마지막 밤. 이제, 내일, 귀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