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혼술 - 2. 합정역 미야비 하나레
니혼슈 日本酒 를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이 마셔보지 못했어요. 찐득하게 남는 뒷맛 - 나중에 알고 보니 쌀 맛인 것 같은데요 - 그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먹다 보면 금방 질리는 것도 그 맛 때문이고요. 금방 질리니까 혼자 한 병을 다 마시기도 힘들어요.
일본에 여행 가면 니혼슈를 잔으로 마실 수 있으니까 가끔 마시곤 했거든요? 그렇다면 국내에도 잔으로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역시 잘 찾아보니 한 병을 통으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가게들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혼술'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렇게 찾아간 곳이 합정역 근처의 미야비 하나레입니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건 유튜브를 통해서입니다. 미야비 하나레의 니혼슈 소믈리에인 유키님이 운영하시는 유튜브 채널이 제 알고리즘에 떴거든요.
아, 제가 '사케(sake 酒)'라고 하지 않고 '니혼슈(日本酒)'라고 표현하는 이유는요. 사케는 '술'이라는 뜻이라서 일본의 니혼슈, 쇼츄, 우메슈 등 모든 술을 포함하는 단어고요. 니혼슈는 그중에서 쌀을 주원료로 한 발효주를 말하는 거거든요.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미야비 하나레에 도착했습니다. 메뉴판을 정독하기 전에 일단 시원하게 마시려고 고구마 쇼츄 소다와리를 한 잔 주문했어요.
모둠 사시미와 안키모(아구간) 군함말이를 주문했습니다. 사시미들은 숙성도 좋았고 다 맛있었어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생선인 잿방어와 청어가 맛있었어요.
안키모를 '갈아서' 군함 위에 올렸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안 그래도 부드러운 아구간을 갈아버리니까 아예 크림처럼 느껴지더군요. 이것도 별미였습니다.
첫 번째 니혼슈 추천을 부탁드렸습니다. 역시 날이 더우니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걸 추천해 주셨어요. 고젠슈 보다이모토 니고리자케 라이토 御前酒 菩提もとにごり酒ライト. 우리나라에서 흔히 마실 순 없는 '니고리 자케 にごり酒' 입니다. 술을 만들 때 침전물을 모두 걸러내서 맑게 만드는 과정이 있는데, 니고리 자케란 침전물을 완전하게 걸러내지 않고 술을 탁하게 만든 걸 말합니다.
아무래도 탁한 술이기 때문에 막걸리처럼 더 끈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걸 깔끔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라이토 light ライト'라는 이름을 붙였나 봐요. 차갑게 마셨는데 약간의 탄산감과 함께 깔끔한 술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한 잔'씩은 판매하지 않고 180ml 씩 주문할 수 있더라고요. 작은 잔으로 치면 약 3잔 정도 되는 양입니다. 소주잔으로는 꽉꽉 채워서 3잔 정도 되겠네요. 좀 큰 니혼슈 잔으로 하면 두 잔 정도 됩니다. 혼자 여러 종류를 마시려면 쉽지 않은 양이긴 하지만, 한 병을 통으로 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그래도, 저는, 80ml나 100ml 정도로도 팔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야 더 다양한 종류를 마실 수 있잖아요.
아무래도 여름이라 여름 한정 니혼슈들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스이게이 준마이긴조 긴레이 사마 酔鯨 純米吟醸吟麗 summer 입니다. 스이게이는 고래 그림을 레이블로 쓰는 니혼슈인데, 여기저기 이자카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브랜드입니다. 이건 거기서 나온 여름 한정판이에요. 그래서 이름 끝에 '사마 summer'가 붙어 있죠. (일본식 영어 발음이에요. 섬머 아니고 사마. ㅋㅋ)
이건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니혼슈를 싫어하는 이유인 찝찔한 끝맛이 그대로 느껴져요. 그래서 소믈리에이신 유키님에게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걸 추천해 주셨어요.
아라마사와 같은 6호 효모를 사용했다고 하는 하루카즈미 아카라베루 春霞 赤ラベル 입니다. 아라마사 新政 는 너무 유명한 니혼슈죠. 새로운 니혼슈의 바람을 만들어가는 선두에 있는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한 번 마셔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어요. 지금까지 저의 최애 니혼슈입니다.
하루카즈미 아카라베루는 아라마사의 그 유명한 6호 효모를 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조법도 코칭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정말 이 술에서는 아라마사가 느껴집니다. 향긋하고 화사한 향과 약한 발포감 그리고 아주 깔끔한 뒷맛. 전형적인 모던 타입의 니혼슈였어요. 이날 마셨던 니혼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마 저의 최애인 아라마사와 비슷해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루카즈미가 너무 맘에 들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비슷하면서도 더 깔끔한 스타일이라면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아주마츠루 지 오리진 야마타니시키 東鶴 THE ORIGIN 山田錦 입니다. 이건 향긋함보다는 상쾌함이 독보적입니다. 시원하게 마시니까 아주 기분 좋을 정도로 깔끔해요. 취향에 따라 좋아하실 분들이 많은 니혼슈라고 생각합니다.
슬슬 탄수화물이 필요해서 고등어 봉초밥을 하나 주문했는데요... 솔직히 고등어 상태가 아주 좋진 않았던 것 같아요. 모둠 사시미의 생선들은 상태가 무척 좋았어서 기대했는데... 조금 아쉬웠어요. ㅠㅜ
슬슬 마지막 니혼슈를 추천받았습니다. 아마 소믈리에님은 니혼슈의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루카즈미와 아주마츠루로 향긋한 모던과 상쾌한 모던을 느껴봤다면 이번엔 좀 더 전통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모던함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그렇게 추천해 주신 간기 노이치 雁木 ノ壱 입니다.
그동안 흔히 마시던, 다시 말하면 찝찔한 쌀맛이 남는 니혼슈와 많이 닮아 있는 술입니다만 이상하게 뒷맛이 좀 더 깔끔합니다. 어쩌면 아마구치 甘口 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분들은 이 술이 입에 맞으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향긋한 술들은 어쩔 수 없이 아마구치거든요.
이건 제 얘긴데요. 그동안 저도 병적으로 아마구치를 거부하고 카라구치 辛口 만을 마셨거든요? 오히려 그게 저를 니혼슈와 친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왠지 아마구치라고 하면 엄청 달달한 전통주가 떠오르잖아요. 근데 생각보다 달지 않고 오히려 향긋하더라고요. 단맛을 극도로 배제하면 아무래도 쌀맛만이 남아서 제가 싫어하는 그 찝찔한 뒷맛이 남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슬슬 마무리하려고 할 때 서비스로 곶감을 하나 주셨습니다. 곶감 안에 크림치즈를 채운 건데요. 디저트로 아주 딱이더군요!
미야비 하나레에 다녀온 이후에 니혼슈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특히 니혼슈 소믈리에이신 유키님의 추천이 다른 곳들에 비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술을 주문할 때마다 서빙하시기 전에 조금씩 맛을 보시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뢰가 커졌습니다. 손님에게 서빙해도 되는 컨디션인지 확인해 보시는 거겠죠.
조만간 다시, 혼자 찾아가서 향긋한 모던 스타일의 니혼슈들을 마셔볼 생각입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