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산책 (1/4) - 진주회관과 덕수궁 돌담길
백수 시절이 자꾸 길어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자의적인 선택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실업률이 사회 문제라거나 퇴직이 빨라지고 있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늘어지는 백수의 시절을 더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서울을 여행하듯, 서울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듯이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코스를 정해서 돌아다녀 보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음, 아뇨. 더 솔직하고 더 정확하게 얘기해야겠습니다. INFP 중에서도 극단적인 P인 저는 여행 중에 코스를 미리 계획하지 않습니다. 그냥 '구역' 정도를 정한다고 할까요. 대충 '오늘은 이쪽 동네를 돌아다녀 볼까?'라고 정한 다음 그 근처를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멋대로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첫 번째로 정한 '구역'은 바로 정동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을 산책한다'라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동네예요. 덕수궁 돌담길, 시립미술관, 정동교회와 정동길.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동네도 아닌데 정감이 가는 동네입니다. 이 동네, 싫어하는 분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하철을 타고 시청 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을 여행한다'라고 생각을 바꿔먹었더니 매일 보는 이 뻔한 광경들도 갑자기 사진으로 담고 싶어 집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러면 그냥 관광객인척, 외국인인척 해버리면 되죠. 어차피 요즘 서울에는 외국인이 진짜! 많더라고요.
점심시간이 좀 지난 시각, 일부러 브레이크 타임 직전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콩국수 집 중 하나인 진주회관입니다. 이 시간에도 줄을 서긴 하네요. 그래도 대기 시간은 짧았습니다. 5분? 10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만, 혼자라서였을까요? 문 앞의, 아주 더운 자리를 주셨습니다.
콩국수 한 그릇에 16,000원. 꽤 비싼 금액이죠. 선불입니다. 카드를 드리면 가져가서 결제를 하시고 가져다주십니다. 그리고 조금 더 기다리면 콩국수가 나옵니다. 그 사이에 혼자 오신 아저씨 한 분이랑 합석했어요. 혼자 다니면 이런 건 감수해야죠. 그래야 다음에 제가 신세 질 수도 있고요.
아주 진한 콩국입니다. 입에 넣자마자 고소해요. 역시 명불허전이네요. 이렇게까지 고소할 일인가요? 음, 어쩌면 이 고소함은 그저 '미리 간을 조금 해서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쨌거나 아주 맛있는 국물임에는 분명합니다.
다만, 콩국수를 먹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요. 진짜로 콩국수에 어울리는 '면'은 무엇일까요? 지금 이 상태가 최선일까요? 그 어느 가게를 가도 면이 마음에 든 적은 없습니다. 이름이 '국수'인데 면보다는 국물이 중심인 음식이죠. 오히려 팥죽처럼 작은 옹심이를 넣어서 먹으면 더 맛있을까? 싶을 정도로 '면'이 중요하지 않은 음식이에요.
점심을 먹고 드디어 산책을 시작합니다. 8월의 한가운데. 날은 덥디 덥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네요.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섰습니다. 여기서부터 산책의 시작입니다.
덕수궁 돌담길. 습도가 높고 더운 날이었습니다만 그늘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불어 시원한 느낌이 납니다. 사진을 한 장 찍고, 조금 걷다가 길가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다가 다시 일어나 사진을 한 장 찍고 또 조금 걷는, 그런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 산책이 어울리는 길입니다.
이 길은 그 자체로 예쁘기도 하지만 저에게 더 특별한 이유는 이 길의 끝에 제가 좋아하는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포스팅에 얘기할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 길이죠. 저에게 시립미술관은 이 돌담길을 포함한 정동 전체를 안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아, 이거 사진이 너무 많아서 이번 포스팅은 이 정도에서 마쳐야겠습니다. 이번 산책에서 찍은 사진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너무 많아서 글보다는 사진 위주의 포스팅을 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