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이면 될 거리를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돌았다.
시마바라 항에서 출항하는 배의 운행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는 시마바라의 풍경은 태풍이 왔다는 걸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홈페이지 체크. 편도 한 시간이 걸리는 카페리와 편도 30분이 걸리는 쾌속선. 두 종류의 배가 있는데 아직은 모두 보류 중으로 결항이 결정되진 않았다. 창밖의 하늘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단은 조식을 먹었다. 평소엔 아침을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배를 타기 전에 배를 채우기 위해서 호텔을 예약할 때 조식을 포함해두었었다. 간단하지만 정갈한 아침 식사.
식사를 마치고 방에 올라와서 다시 홈페이지를 확인해보니, 오늘 하루 모든 배가 결항이라는 소식이 업데이트되었다. 오후의 배라도 뜬다면 기다렸다가 배를 탔을 텐데, 모든 배가 결항. 이렇게 된 김에 시마바라에 하루 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일 예약해둔 구마모토의 호텔을 확인해보니, 예약을 취소하면 환불 수수료가 100%. 파격 할인가에 예약을 했더니 예약 취소나 변경이 불가능한 상품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PLAN B를 실행해야 한다.
PLAN B는 바로 기차를 타고 구마모토로 넘어가는 것이다. 총 세 종류의 기차를 타야 했다.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 역 → 이사하야(諫早) 역] 구간은 시마바라의 지역 철도인 시마바라선을 탄다. 이사하야에서 JR 나가사키 본선으로 갈아타고 [이사하야(諫早) 역 → 신토스(新鳥栖) 역] 구간을 이동. 이때 이용하는 열차는 전에도 탔던 적이 있는 시로이 카모메(白いかもめ). 하얀 갈매기라는 뜻으로 꽤 귀엽게 생긴 특급 열차다. 신토스 역은 신칸센이 지나는 역이다. 큐슈의 저 아래인 가고시마부터 위쪽으로는 신오사카까지 연결하는 신칸센 사쿠라(さくら)를 이용해 [신토스(新鳥栖) 역 → 구마모토(熊本) 역] 구간을 이동하면,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총 세 종류의 기차를 이용해서 구마모토에 도착할 수 있다.
쾌속선을 이용하면 30분 만에 건너갈 수 있는 곳이지만, 어쩌겠는가 태풍이 여행을 도와주지 않는 걸. 결국 오늘 하루는 역에서 역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끝날 예정이다.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 역(현재는 시마바라후타츠 島原船津 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도착해 열차표를 사려고 하니 역무원이 뭔가 다른 걸 사라고 설명을 해준다.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싸다'는 말을 알아듣고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더니, 일요일에만 판매하는 '시마테츠 프리 패스'이라는 게 있는 거였다. 시마바라선을 운영하는 시마테츠라는 회사에 소속된 열차와 버스를 하루 종일 1000엔으로 탈 수 있는 패스. 나는 어차피 편도로 이사하야까지만 가면 되니까 패스가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어쨌든 내가 가야 하는 구간 요금보다 패스가 더 쌌다! 2~300엔 정도를 아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열차를 기다렸다.
열차가 들어오는데 뭔가 요란한 그림이 있다. 음? 뭐지? 하고 열차를 탔더니, 최초의 증기 기관차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열차 한 칸에 가득하다. 역사가 오래된 시마테츠를 광고하는 열차였던 거다.
의외로 바람이 세지 않고 하늘도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열차가 출발한 다음 금방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빗방울이 굵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리아케 해(有明海)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에는 모든 배의 결항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열차는 괜찮은 걸까? 이 열차도 운행 중지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높은 파도가 둑을 넘어 열차의 창문까지 와서 닿고 있었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이사하야(諫早) 역에 도착했다. JR 노선을 타는 플랫폼을 이동해 다음에 타야 할 기차인 시로이 카모메를 기다렸다. 특급 열차인 시로이 카모메는 꽤 귀엽게 생긴 열차다. 후쿠오카의 하카타(博多) 역과 나가사키(長崎) 역 사이를 운행하기 때문에 예전에 나가사키 여행을 할 때 타봤던 열차라서 왠지 모르게 반갑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하야 역을 출발하면 열차의 오른편으로는 여전히 아리아케 해가 보인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여전히 빗방울을 뿌려대고 있었다. 시마바라 선처럼 바로 바다 옆을 달리지는 않아서 파도가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날씨가 굉장히 안 좋다는 건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아, 하필이면 내가 여행하고 있는 동안 태풍이 오다니. 그것도 내가 배를 타려고 하는 바로 그날!!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덧 기차 여행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만 돌아가면 여행에 재미가 없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생기는 것이 여행의 묘미겠지.
미리 얘기하자면 여행 기간 중에 태풍을 한 번 더 만난다. 약 40일간의 여행 동안 두 번의 태풍이라니. 나중에 미야자키(宮崎)에 갔을 때의 얘기니까 그때 다시 썰을 풀어보기로 하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신토스역에 도착했다. 가고시마 본선과 나가사키 본선이 갈라지는 역으로 큐슈 신칸센이 지나는 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얘기는 이 역에서 드디어 신칸센을 탈 수 있다는 얘기. 평소 같으면 굳이 신칸센을 타지 않았을 테지만 이게 마지막, 세 번째 기차니까 좀 빠르게 가고 싶었다.
기차를 타기 전에 매점에 들러 에키벤을 하나 샀다. 이 동네의 특산 도시락이 뭔지를 알아볼 시간과 정신은 없어서 도시락들을 구경하다가 슈마이 도시락을 하나 집었다.
이 날 기차를 세 번 타면서 실수를 하나 한 것이 있다면 신칸센 구간에서 에키벤을 산 것이다. 열차가 너무 빠르다 보니 신토스 역에서 구마모토 역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걸 미처 생각 못 한 거다. 자리에 앉자마자 도시락을 열어서 급하게 도시락을 먹어야만 했다. 차라리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로이 카모메 구간에서 조금 이른 점심을 먹었어야 했다. 그러면 여유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 구마모토에 갔을 때 묵었던 KKR 호텔이 마음에 들어 이번에도 예약을 해두었었다. 창 밖으로 구마모토 성이 바로 보이는 곳이라 위치도 좋고, 시설도 좋고, 직원들의 서비스도 좋은 호텔인데 구마모토 성이 보수 중이라 관광객이 적은 건지 꽤 싸게 투숙할 수 있는 호텔이었다(3년 전 이야기니 지금은 달라졌을 수도...).
체크인을 위해 호텔에 도착했지만 아직 체크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서 짐을 맡겨두고 쇼핑을 나가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이 머나먼 남쪽나라 미야코 섬이었기 때문에 두꺼운 외투를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태풍도 올라오고 점점 가을이 깊어지면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가지고 있는 옷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만간 야쿠시마(屋久島)에 들어가면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트래킹을 해야 할 테니 걷기에 편한 운동화도 사야 했다.
츠루야 백화점, 쇼핑몰 COCOSA, 돈키호테 등이 모여 있는 동네까지 걸어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하며 쇼핑을 했다. 생각보다 일본은 옷이 비싸다는 걸 깨닫고는 마음에 드는 옷을 살 수가 없었다. 결국 ZARA에서 목도리를 하나 사고, 돈키호테에서 싸구려 후드 짚업을 하나 사서 가지고 있는 옷들과 겹쳐 있는 걸로 버텨보기로 했다. 운동화도 제일 싸고 가벼운 걸로 하나 구매!
여기서 쓸데없는 정보를 하나 투척하자면, 평소에 짧은 기간 동안 여행을 다닐 때는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다닌다. 여행 중에 다른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품까지 모조리 들고 가서 호텔에 풀어놓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스타일.
하지만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여행을 할 때는 최대한 짐을 줄이려 노력한다. 항상 트렁크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교통편을 탈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데다가, 짐을 들고 뛰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여행이 길어지면 다양한 일이 생기니까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짐을 다 챙겨 올 수도 없으니 '필요한 건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생각으로 짐을 꾸리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어깨에 메는 여행 가방 하나만으로 출발했다. 그러니 이렇게 중간중간 필요한 옷이나 신발을 보충(?)해줘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체크인 한 다음에는 로비에 '빨래'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호텔에서 세탁을 해주기는 하지만 서비스 비용이 비싸고, 세탁기나 코인 런더리는 호텔 내에 없다고 했다. 가까운 코인 런더리를 알려준다고 해서 다녀왔다. 장기 여행에는 정기적으로 빨리를 해야 하는 것도 해결할 필요가 있는 과제 중의 하나다.
쇼핑을 하고, 빨래를 하고, 방에 짐을 풀고 쉬면서 이후의 스케줄에 대해서 고민을 좀 해봤다. 구마모토에 온 이유는 렌터카를 빌려 다카치호(高千穂)에 다녀오고 싶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아소산(阿蘇山) 반대쪽인 노베오카(延岡) 쪽에서 다녀올 수도 있으니 날씨 상황을 보고 결정하려고 했는데, 막상 태풍을 만나고 나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모든 여행지의 날씨가 좋을 수는 없다. 태풍이나 지진 같이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덤벼봐야겠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다카치호를 볼 수 있을 테고, 날이 흐리면 날이 흐린 다카치호를 볼 수 있겠지. 물론,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맑은 하늘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긴 했다.
그런 생각으로 구마모토의 숙소를 하루 연장하고, 내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렌터카를 예약했다. 그리고 모레부터 3박 4일 동안 야쿠시마(屋久島)의 숙소와 렌터카를 예약했다. 오래전 소설과 만화, 사진으로 알고 있는 곳이긴 했지만 여행을 출발할 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인데, 가고시마(鹿児島) 쪽으로 내려가는 계획을 잡다 보니 지도에 야쿠시마가 보였다. 아! 여기도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버린 거다.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하고 싶은 것도 더 많아지고, 생각할 것도 많아졌다. 그리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추진력도 더 강해졌다.
이후의 일정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배가 고파졌다. 타베로그와 구글맵을 뒤져 몇 군데 식당을 찾아갔는데 모두 만석이었다. 일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은 식당도 있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쏘다니다가 야마모토야(山本屋食堂)라는 식당을 발견했다. 오래된 식당의 포스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나도 모르게 발길이 끌렸다.
덴뿌라 정식과 소츄를 주문했다. 튀김은 매우 매력적이긴 했으나 꽤 비싼 가격을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따끈한 밥과 국을 먹으며 소츄를 한 잔 하니 몸이 살짝 데워지면서 긴 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피곤했던 몸이 좀 녹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었으니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지난번에 구마모토에 왔을 때 안면을 터놓은 바 CHARMING. 도착하니 마스터인 히로시상이 아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오늘 밤엔 Rock DJing이 있을 예정이니 같이 놀자고 해서 꽤 늦은 시간까지 같이 술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단골들과 어울렸다.
지난번에 이곳에 들렀을 때에는 단골들이 우쿨렐레 연주와 훌라 춤을 연습하는 걸 구경하면서 함께 어울렸었는데 이번엔 롹 음악으로 디제잉을 하면서 방방 뛰는 걸 함께 어울리니 겨우 두 번째인데도 엄청 단골이 된 것 같은 기분.
CHARIMING 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며 마시다 보니 새벽에 라면이 먹고 싶어 졌다. 근처에 뭐가 있나 검색을 해보니 라멘 아카구미(ラーメン 赤組)라는 가게를 발견. 구마모토 라멘은 돈코츠 베이스에 닭 육수를 조금 넣는 것이라는데 베이스가 돈코츠라서 그런지 꽤나 마음에 드는 맛이었다.
뜨거운 국물과 함께 한 잔 해야 되나? 싶어서 니혼슈를 달라고 하니 없단다. 그래서 맥주를 마시면서 메뉴판을 보니. 당연하게도 소츄는 있다. 주문 실수였다. 니혼슈가 아니라 소츄를 달라고 했어야 되는 건데. -0-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잠깐 들렀는데 엄청나게 많은 술의 종류에 놀랐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몰트인 하큐슈가 너무 귀여운 병에 들어있는 걸 발견. 나중에 귀국할 때 두세 병 사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