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인 마음에 대하여 <Cy Twombly>
어떤 날에는 이 작품이 취미가 사랑인 제 마음에 꽃이 핀 날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에는 어지럽혀져 둘 곳 없는 제 마음처럼 누군가가 밟아버린 꽃밭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가는 무제라고 작품을 놔두었는지.
사람들은 추상화를 어렵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추상화는 어쩌면 훨씬 쉽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꼭 정답이 있는 그림이 아니라 도통 무얼 그렸는지 몰라 내 마음 따라 보이는 대로 보면 된다고 말이죠.
그림은 보는 이의 감상으로 완성된다는 한 작가의 말처럼, 보이는 대로 보고, 느껴지는 대로 느꼈을 때 맘에 들면 나한테 좋은 그림입니다. 아니면 그만이고요. 음악처럼 그림도 생각하면 좀 더 쉬워지겠죠.
내 취향에 맞는 노래가 있는 것처럼 그림도 그렇게 취향을 찾아가고, 가끔은 가사가 있는 노래보다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 더 맘에 와 닿는 것처럼 추상화는 가사없는 음악이죠.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것들은 세상에 몇 가지 안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이겠지요. 가령, 사랑이라든지 믿음이라든지.
추상화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마음에 대하여.
싸이 톰블리의 그림을 보면서. (Cy Twombly, 1928-2011)
싸이 톰블리라는 이름이 굉장히 생소한 분들이 많겠지만 싸이 톰블리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미국뿐 아니라 유럽인들이 사랑하는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싸이 톰블리가 유럽을 사랑했죠.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삶을 살았고 저 역시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만났었습니다.
마치 낙서와 같아 사실 아주 쉬워 보이는 싸이 톰블리의 작품이지만 아래의 작품,
실제로 칠판에 작업한 아래 작품은 무려 2015년 소더비 경매에서 824억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돈으로 그림을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어머어마한 그림 가격만 보더라도 그가 미술사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만 합니다.
싸이 톰블리가 활동했던 1900년대 초 중반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에너지를 가지고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유럽과는 다른 미국 추상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분위기속에서 훌륭한 예술가들이 활동했습니다. 잭슨 폴록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탄생했죠.
그 속에서 싸이 톰블리 역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갔고, 낙서 같은 그의 그림들은 쉬워 보이지만 그만의 독창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 그림이 아무리 낙서처럼 보여도, 아무도 내 그림을 흉내 낼 수 없다.
싸이 톰블리
마음이 어지러워 끄적여보았던 지난 어떤 날의 내 낙서처럼, 지금은 알아볼 수 없지만 그 낙서 속에는 그 날의 내 생각과 고민의 흔적이 남겨진 것처럼,
싸이 톰블리는 늘 자신이 보고 느끼고 영감을 얻은 것들을 색으로, 선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한 톰블리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과 일관된 노력이 그의 그림이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일지라도 한 작품 한 작품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아우라를 얻게 만들었는지. 개인적으로는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닐지도.)
이 날의 싸이 톰블리는 어떤 맘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예쁜 꽃 같기도, 화려한 불꽃같기도, 피멍 든 마음 같기도.
위의 그림은 정말 별 것 없는 낙서처럼 보이지요?
이 그림은 싸이 톰블리가 43살 때, 늘 함께 해주었던 동료이자 파트너, 갤러리스트 그리고 아내였던 플리니오 드 마티스(Plinio De Martiis)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를 생각하며 만든 추모작입니다.
그 사람의 스토리를 듣고 나면 낙서처럼 보였던 이 작품에서 숙연함이 느껴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만큼만 상대에게 공감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만 타인을 판단하는 우매함을 쉽게 저질러버립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그 어리석은 우매함이 싫어 부단히도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함만이 조금씩 조금씩 나의 세계관을 확장시켜 더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판단할 거라면 차라리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연습이 더 낫겠어요.
싸이 톰블리가 저 그림을 그리며 어떤 감정이었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사람이 어떠한 시간을 거쳐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는 함부로 얘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슬픔은 당신이 죽어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슬프기도, 사실은 생각보다는 가벼울지도.
나의 기쁨은 주체할 수 없이 기쁜 일일지도, 혹은 아닐지도.
나조차도 과거의 나를 헤아리지 못한 나날들이 있기에.
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추상화처럼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관계는 모양이 다 달라서
사람의 마음은 무늬가 다 달라서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두 사람의 눈빛을 다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세 사람의 대화를 다 들어보지 않고서는.
나에 대해 그들에 대해 함부로 정의내릴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