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 마흔 , 마드리드가 부른다 .
결혼과 육아, 각자의 이유들로 나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내려놓고 경력 단절의 길을 걷고 있는, 빛나던 친구들이 있다. 그녀들은 항상 한 숨을 섞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니까 얼마나 좋니. 부럽다.”라고.
(레알)피를 토하도록 일은 하는데 늘 주머니 사정은 곤궁했으니 행복했다고만 할 순 없었다. 소위 말하는 ‘대목’ 시즌마다 남의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고 내 가족을 내 팽개치던 건 당연했다. 내 몸이 망가져가는 걸 알면서도 잘 돌보지 못한 채 결국 수술로 일을 그만두게 된 건 더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수화기 너머 친구들의 그 한 숨이 사그라지면 나는 항상 “여행을 떠나!!”라고 말했다. 다름 아닌 ‘정리여행’이다. 특히 인생의 2막을 시작하려 고민하는 친구들에겐 거창한 여행이 아니더라도 혼자 아무 버스 잡아타고 모르는 동네에 내려 걸으며 생각을 정리해 보라고 설득했었다. 어디론가 떠났다 돌아오는 것이 ‘여행’의 숙명이라면 그 목적을 ‘정리’에 두는 사람이 나였고 ‘정리여행’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2016년의 브런치 글에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무척이나 용감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녀들의 한 숨 이후 짧은 ‘정적’, 그 찰나의 의미를 이해한다. 갑자기 며칠 씩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거니와 비용은 어쩔 것이며, 여자 혼자 어디로 어떻게 떠나란 말인가? 예전 같으면 그 물음에 이렇게 저렇게 방법을 제시하며 설득했던 나인데, 스스로 움츠러들어 사고 회로가 정지하고 말았던 거다.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고 먹는 만큼 가만히 앉아 살찌는 일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24시간 떼어 놓지 않았던 음악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아팠다.
다행히 내 곁엔 항상 같이 싸워 줄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A다. 그는 내가 정신줄을 놓지 않도록 옆에서 많은 애를 썼다. 돌연 세상의 끈을 놔버린 친구들의 부고마저 이어지며 서른아홉 마지막 6개월을 멍한 채, 툭하면 울며 보내던 나를 보살펴줬다. 지난해 10월엔 강원도 깊은 산골을 유랑(=요양)하며 왕년의 ‘갬성’을 찾도록 도와줬다. ‘음악 콘텐츠 기획자’로서의 삶이 끝나버린 내게 ‘극본’이라는 새로운 창작 영역을 열어준 것 역시 A였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작가 알베르 까뮈는 “삶을 송두리째 다 잃지 않기 위해서 얼마간의 삶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란 말을 남겼다고 일러주면서.
어디다가 누구에게 바쳐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던 순간에도 한 턱 크게 쏜 것 같은데,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가는 이 순간엔 건강까지 합쳐서 한 턱이 다 뭐냐 몇 트럭 크게 바치는 바이다. 어쨌든 “마지막 서른아홉”을 지켜내고 “진정한 마흔”을 만끽하기 위해,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위해 ‘정리여행’을 떠나겠다고 선전 포고한 이 우선순위가 제대로 된 것이길 바랄 뿐이다.
냉수 한 사발과 자기반성, 불꽃 검색의 사투 끝에 최저가 항공권 검색 결과가 나왔다. 단 한 곳도 경유하지 않는 Non-Stop을 옵션으로 설정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유럽의 도시들을 검색했다. 결과 <마드리드>가 나를 부른다. 스페인에는 2번 가 보았다. 첫 번째는 밴드 ‘글렌체크(Glen Check)와 함께 일주일간 바르셀로나에서 머물렀고, 두 번째는 A와 파리 테러를 뚫고 스페인으로 넘어가 바르셀로나, 세비야, 그라나다를 2주간 여행했다. 다음 스페인 여행엔 마드리드에 꼭 가 보자며, 특히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준비하며 참 설레던 기억도 있다. 당시엔 한라산, 후지산도 다녀왔을 만큼 도보 여행을 즐겼을 때니까. 교통사고 이후 잘 걷지 못하는 삶을 마주하면서는 나도 모르게 마드리드라는 도시를 피해왔던 것 같다. ‘Hola!(올라-안녕)’로 대동 단결할 수 있는 친근함이 있는 도시 마드리드.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를 만날 수 있는 마드리드. 공항 약자마저 마음에 드는 MAD. 맛있는 거 많이 있는 마드리드. “그래, 너로 정했다!”
9월 첫 주 평일에 출발하고 11월의 평일에 돌아오는 설정만이 최최최저가였다. 티켓 유효기간은 90일, 그 순간 떨리는 마음의 소리 - “여행을 넘어선 체류가 아닌가!”-. 통장 잔고보다 카드 결제한도액이 더 높은 나니까, 생일을 마드리드에서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수학여행 때나 해 본 ‘떼’ 잠의 기억을 살려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묶으면 될 테니까, 극성수기는 아닐 테니까 크으---, 누구와 상의할 필요도 없이 결제를 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살찔 땐 누구랑 상의해서 쪘던가!! 그러고 보니 최근 살이 빠졌다. 역시 A 덕분인데, 2017년 수술 직전 무렵까지 회복했다. 집을 보러 다니며 살살 걷는 내 한계치를 가늠하고 매일 몇 걸음 더 걷도록 두 달간의 치밀한 설계를 세운 거였다. 이제 하루 5 천 걸음쯤은 쉬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인대와 관절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루는 1만 2 천 걸음이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집 근처 봉산을 올라 절룩이며 내려왔다가 미련하게 2박 3일을 내리 뻗어있었다. “걷지 말라”던 의사 양반들아, 나는 죽을 때까지 걷는 걸 포기하지 않겠‘읍’니다. (그래도 하루 20킬로미터씩 걸어야 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꿈속에 모셔둬야 하겠지.)
어쨌든 가자, 정리여행! 가자, 마드리드!!
내 삶의 커다란 변곡점마다 새롭게 깨어나도록 도와준 그것. 낯선 도시의 고요와 활기와 돌발상황을 선사하며 자신에게 귀 기울이게 하는 그것. 다가올 마흔을 준비하고, 새로운 직업을 마주할 ‘인생 2막’의 정리여행은, 한 살이라도 젊어지려고 뜬금없이 떠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백수다. 모아둔 적금도 돈도 없다. 하늘이 도우 사 딱 항공료만큼 전셋집 시세 차익이 생겼다. 스페인어? 영어도 못한다. 여행 경비는 쓸 만한 물건들을 처분하고, 비행기 뜨기 하루 전까지 프로젝트 참여로 마련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지니 않고 있는 게 이럴 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우선 도서관에 가서 마드리드 체류에 도움될 만한 것들을 찾아봐야겠으나 이사하고 바로 떠나야 하는 일정. welcome to the 난.장.판 , 헬게이트 !!
BGM ㅣ Flo Morrissey, Matt White - Look at what the light did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