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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Sep 09. 2019

왜 , 마드리드였나 . (02)

돈이 없다고 용기도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을 믿는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믿는 것이 바로 바람직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 라이언 레슬리



스스로 완벽하다 혹은 완벽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적은 없지만, 함께 일한 동료나 거래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나는 일에서건 삶에서건 완벽을 ‘갈구’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 땅을 치고 후회하는 건 다름 아닌 국영수를 잘했어야만 했다는 사실. 전형적인 예체능 진학생으로 살아온 나는 먼 길 떠날 때마다 “국영수를 제대로 했어야 해!!”라며 깊은 빡침을 끌어안고 이불 킥을 시전 한다. 학력과 지적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니 몸은 항상 고달팠고 새벽 두 세시에 퇴근해도 반드시 다음날 아침 8시 50분까지는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만 했다. 나만의 안전지대 같은 게 있어서 그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그 들쭉날쭉한 스케줄 속에서도 말이다. 오죽하면 함께 일하던 나의 BOSS, 밴드 ‘자우림’의 드러머 구태훈 형님이 “살벌하게 일하는 주미쇼 씨”라고 업체 담당자들에게 습관처럼 나를 소개했다. 그뿐이냐, 한국 락 음악의 대부이자 쏘울 그 자체, 전방위 예술가 ‘한대수’ 할아버지 역시 “양호한 여자, 밴드들의 마더 테레사,  ROCK ME , JUME!”라는 특유의 추임새로 언제나 불러주셨다.



TV를 즐겨 보지 않는 나는 평생 누군가와 채널 싸움을 벌인적이 없다. 누군가 틀어 둔 채널을 무심히 응시할 뿐. 그래서 평소 같으면 1도 안 보는 프로그램이 <전지적 참견 시점>인데, 어느 날 우연하게도 가수 ‘청하’와 그녀의 매니저가 출연한 순간을 마주했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홀짝이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인데, 청하의 매니저와 과거의 내가 자꾸 오버랩되더니 점점 주체할 수 없이 폭풍오열. 


“내가, 정말, 음악, 일을, 사랑, 했어.” 


눈물 콧물이 범벅된 목소리로 뚝뚝 단어를 내뱉곤 유난히 짠 커피맛을 본 저녁이 되고 말았다. 20년을 넘게 이 일을 했으니 함께 해 온 뮤지션들이 셀 수 없이 많다. 12년 차 정도 됐을 때, 완전한 신인(=무명) 뮤지션을 발굴하고 영입 해 그들을 세상에 알리고, 수익적으로도 일정 궤도에 진입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가진 직급이 되었다. (지금은 서로 다른 회사로 독립했지만) 그 당시 함께 시작해 아직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인 두 팀이 있는데, 밴드 ‘글렌체크(GLEN CHECK)’와 ‘전기뱀장어’다. 특히 글렌체크의 데뷔 초 히트곡 가운데 <60’s Cardin>의 퍼포먼스와 안무를 기획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다. 


2012 지산밸리록페스티벌에서 무대를 뽀개고, 앞으로 그들의 공연을 떠올릴 때마다 회자될 킬링 파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해 퍼포먼스를 제안했다. 전문 댄서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늘 글렌체크와 함께 움직이는 아트워크 집단(당시 ‘베이스먼트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비주얼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 동료들을 통칭했다.)을 퍼포먼스팀으로 지명했다. 모두 흔쾌히 참여했다. 특히 마스코트 ‘타이거디스코’의 복고 감성은 독보적이었다. 팀과 관객이 한 번 보고 바로 따라 할 수 있는 ‘율동’ 수준의 안무를 연구하고 가르쳐 함께 춤췄다. “누나도 같이 해요.” 란 준원군의 말에 힘입어 나도 그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현장 반응은 정말 뜨거웠다.

 

2012 겨울. 글렌체크와 베이스먼트레지스탕스들. 나도 있지롱.


페스티벌이 끝나고 딱 일주일 후 금요일, 홍대의 한 음악 바에서 친구와 이야길 나누고 있었는데 어떤 손님들이 <60’s Cardin>을 신청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속 쾌재를 불렀는데, 두 손님이 내 안무를 복기하며 따라 추고 있었다. ‘원작자’ 부심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순간! 아드레날린이 폭주해 두 분께 안무 레슨을 해 드렸다.


이 모든 순간들은 다시 생각해도 짜릿하고 행복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경험과 추억, 경력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런 기억들을 회상하고 떠올리는 이 지점에서 현실과 환상이 우주 대폭발처럼 충돌하고 마는 것이다.  

분명 한 몸이었는데, 사진 찍다보니 둘로 세포 분열 한 마드리드 흑냥들


며칠 전, 한 밤중 창문이 흔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마지막 장마, 게릴라성 폭우였다. 은평구 끝자락의 서식지는 아주 오래된 구옥 단독주택을 리모델 한 집이다. 워낙 연식이 있어 뜯어내 재건축한 게 아니라 벽면과 지붕을 판으로 한 번 씌우고 도배를 한 구조다. 지붕은 일반적 기와가 아니라 임시 트레일러 재질과 유사한 판 구조물로 덮여있어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엔 정말 무시무시한 소리가 난다. 밥 숟가락 만한 몸통, 이쑤시개    보다 두꺼운 다리에 털 난 바퀴벌레도 무시무시하게 출몰한다. 


어쨌든, 너무 이른 새벽 세시. 부스스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오르조(보리를 볶아 미세 분쇄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커피 대용차)를 컵에 가득 채우고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간밤의 폭풍오열(청하와 매니저를 보곤)을 곱씹어 보며 “나도 나를 돌보고 싶은데..,”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서늘함을 이겨내 볼 겸 두 팔을 교차 해 문지르다 스스로를 안아보았다. 이사를 가야 한다는 강력한 핑계로 밖에 나가 광합성을 하다 보니 정신이 좀 맑아진 모양이다. ‘나는 아파, 몸을 쉬어야 해, 움직이면 안 돼, 건강해져야 해.’아픈 몸을 요양한답시고 매일 이불속에 처박혀 추억만을 먹고 살만 찌우고 있었던 거다. 감성팔이 중인 무기력한 하루를 벗어나려면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익숙함이 전혀 없는 낯선 곳에 나를 던져야만 한다는 것을 늘 알고 있지만 억누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면에서 도와달라고 발버둥 치는 그 소리를 왜 무시하고 있었을까. 내가 가지지 못한 건 돈과 건강이지 용기는 아니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


건강 역시 나보다 더 좋지 않음에도 4대륙 횡단하고 철인 5종 경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단전 깊숙이 파묻어둔 용기가 샘솟자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역시 떠나려면 정리여행이 해답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단지 어떤 도시를, 얼마간, 어떤 형태로 여행할는지가 정해지지 않았을 뿐, 이미 마음의 추는 기울었던 상황. 엄마의 마흔 드립 문자가 완벽한 트리거가 되어주었다. 최저가로 당당히 떠오른 마드리드라는 글자. 심지어 공항 약자도 MAD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언제나 나였...ㅋ 그리고 스페인어로 정확히 발음하면 ‘마드릿’에 가깝다고 하던데 어쩐지 그 어감 조차 ‘마흐은’처럼 들려왔다. 


게다가 풍부한 식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수많은 전통시장과 대형마트에서 판매하고 있지 않은가! ‘돈키호테’처럼 일생일대의 가장 큰 모험과 방랑을 즐길 도시로 너무나 적당 해 보였다. 한 달의 여정보다 세 달의 여정이 항공료가 아름다웠다. 평일 출발 평일 도착이기 때문이리라. 숙박비를 모두 호스텔로 돌리면 항공비 차익을 충당할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여행자의 집결지인  솔 광장 Plaza de la Puerta del Sol 인근의 중심부를 완전히 벗어나 주택가와 상업 단지가 적절히 섞인 마드리드 북부 지역을 첫 거처로 삼기로 했다. 


마흔에 배낭여행을 떠나 떼 잠을 자야 한다니, 체력이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무비자 최고 한도인 90일 체류를 꼭 해보고 싶었다. 날백수에게 카드 한도가 왜 이리 높은 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용기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카드사에 고마움을 전하며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될 마드리드행 항공권을 시원하게, 매우 긁었다.


마드리드를 향한 마흔 살 언니의 정리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 꾸는 꿈이 될 것이기에 마드리드 드림이라고 스스로 지어 붙였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간의 여행들을 돌아보았을 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시작이다!


드디어 착륙 준비를 알리는 기장의 음성이 나온다. 다시 배낭 속으로 아이패드를 집어넣을 시간. 비행귀도 잘 끼워야지. 아! 비행귀는 공항에서 보안구역에 들어가기 전, 여행용품 전문 판매처에서 목쿠션을 사러 갔다가 발견한 신박한 물건이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샀지만 결과는 대만족. 이착륙 시마다 고막이 찢어질듯한 고통을 지닌 많은 여러분들께 추천하는 바이다.


BGM l AVICII - 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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