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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Oct 11. 2019

전투 준비 - 솔 광장 무사통과

한인 민박의 애틋함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가라.

버스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무조건 그곳에 가야 한다.

가서 3일을 그곳에서 보내라. 다른 곳은 필요 없다.

- 제리 살츠


한인 민박에 오니까 조식에 열을 올리게 된다. 아침 챙김도 힘겨워하는 성향이었는데, 잠이 덜 깼는데도 투숙객들과 함께 모여 매일 아침을 먹는다. 그 옛날 머슴처럼 쌀밥 한 수저 크게 퍼 올려 입 안 가득 씹어대며 ‘흐으음——’하는 소리도 낸다. 물론 갓 지어 찰기 넘치는 한국의 쌀밥만 하겠냐만 푹 익히고 뜸 들인 쌀밥 한 수저가 왜 이리도 애틋한지. 내가 또 냄비 밥을 참 잘 짓는다. 갑자기 누룽지 먹고 싶...ㅠ


그간의 삶에선 딱히 한식이 없다고 못 사는 사람도 아니었고, 하루 세끼 역시 당연히 챙겨 먹지 않았다. 쌀밥으로 세끼 채우는 건 더 힘겨워했다. 면식 수행과 빵님, 감자로 탄수화물을 흡수해왔으며 마드리드로 오기 3개월 전쯤부터 건강한 생활습관을 위해 무엇이라도 아침에 챙겨 먹는 버릇만 들여왔을 뿐이다. 고추장, 된장, 김치 없다고 큰일 나는 사람도 아니었고 매운 음식도 잘 못 먹었는데, 결국 본투비 한반도의 딸인 것이었다(꽈리고추 멸치볶음 너무 먹고 싶고요).


한인 민박에선 모든 것이 애틋하다. 아침 역시 맛보다 그 음식을 준비한 정성과 갸륵함에 눙물이, 스탭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 퇴실하는 날까지 조식 준비를 도왔다. 투숙객들이 맛있다고 하면 넌지시, 나도 웃음이 났다..

한인 민박에서 준비해 준 아침들



하지만 공용 공간이 인구밀도 대비 적어 붐비는 관계로, 민박에서 글 작업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아예 모르는 동네, 관광객이 없을법한 동네를 찾아 뚝. 떨어져 보기로 했다. 문 앞에서 스탭들이 챙겨주는 과일주스 1팩과 샌드위치를 들고 나서는 길이 참 신났던 이유다. 혼자 뚝 떨어져 이곳저곳을 걷고 생각하다 보면 나를 좀 더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게 될 계기들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숙소가 솔 광장 근처니 주위부터 산책해보기로 했는데, 그곳을 혼자 멍하게 걷고 있으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1. 동물 탈, 브이 포 벤데타 가면을 쓴 놈들이 느닷없이 어깨를 감싸고 사진 찍자고 한다.


  2. ‘Where are you from’을 부르짖는 아프리카 출신의 사내들이 팔찌와 목걸이를 한 다발 들고 다가온다.


  3. 집시와 부랑자들이 낡은 스타벅스 컵을 얼굴에 들이밀고 흔들며 적선을 강요한다.


  4. 비둘기 떼가 얼굴로 날아들고, 머리통 바로 위를 덮어버리며 비행한다. 비둘기 똥 투하 주의.

이른 아침 솔 광장 집시 회합. 오늘의 영업구역 협의중(추정).


이 고얀 것들 때문에 솔 광장은 산책 불가, 아웃!! 마요르 광장 역시 아웃!! (솔을 뚫고 지나가야 하므로) 위쪽 까야오(Callao) 역 방향으로 걸어가 그랑비아(Gran Via)를 보며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을 향해 걷기로 한다. 그리하여 도착한 에스빠냐 광장은? 울랄라, 공사 중!!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 동상을 보고 글빨 좀 받아볼까 했는데. 그의 동상도 공사 중인지 천막에 덮여 있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미리 검색해 둔 화제의 카페들이 이 광장에서 도보 10분 이내라 찾아가 보기로 한다. 


T카페 자리 없음, H카페 자리는 있긴 한데 작업할 공간은 없음. 그래서 아예 저 멀리 마드리드 북쪽 방향에 위치한 L카페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 보기로 했다. 찾아간 곳은 발보아(Balboa) 지역이었다. 인근에 큰 비즈니스 스쿨과 대학가, 관공서, 각국 대사관, 명품거리들이 자리했다. 일단 관광객 아니 동양인이 거리에 나 하나뿐이었다. 구글 맵으로 대충 방향을 잡고 걸어가다 보니 드디어 카페들이 몇 군데 보인다. 빛이 환하게 드는 창가에 Bar도 있고 좌석도 있는 L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Cafe del Dia(오늘의 커피)’도 있고, 가격도 마드리드 중심부보다 저렴했다(이 곳들은 차차 ‘커피 앤 더 시티’ 매거진에 정리를 해 보기로...). 이 지역 탐방을 시작으로 나의 마드리드 산책도 본격 가동됐다.

공사중인 스페인광장과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동상



매일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옥철을 타고(출퇴근 시간 2호선 교대역 이상의 압박감) 모르는 동네에 뚝 떨어진다. 처음 보는 카페에 들어가 떨리는 마음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글 작업을 시작한다. 배가 고파지면 자리를 정리하고 봐 뒀던 근처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민박에서 챙겨준 주스와 샌드위치를 먹는다. 소화를 시키려고 조금씩 걸어본다. 그러다 보면 혼잣말도 하고, 노래도 흥얼거리고, 머릿속에 생각들이 떠오른다. 휴대폰 메모장 보다 직접 휘갈겨 쓴 글씨를 남겨두고 싶은 마음에 근처에 문구점에 들어갔다.  어라, 1유로짜리 메모장 제조사 이름이 ‘세르반테스’네? 근데 오선지다. 뮤지션 용 소형 악보 메모장인가 보다. 뭔들 어떠하리, 연두색으로 하나 샀다. 거창한 무엇인가를 적기보다는 사소한 것들, 지나치면 잊고 마는 일상을 조금씩 적기로 했다. 동네 놀이터에 은퇴한 장년 신사들이 왜 손바닥만 한 수첩을 들고 계셨었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간다. 나 역시 은퇴했지 않은가.


그렇게 며칠을 반복하다 보니 단골집이 생겼다.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향해 환히 웃어준다. 내가 마시는 음료나 토스트 같은 것들을 기억해 준다. 작은 것이 쌓여 일상이 되고 있다. 적어도 마드리드행 정리여행을 결심하며 모르는 동네에서 언어만 안 통하는 이방인인 채, 어떠한 선입견 없이 살아보고 싶다는 목표 하나는 이뤄낸 듯 보였다. 그들에게 마드리드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어쭙잖은 영어로 물었더니 다들 같은 말을 한다. “프라도 미술관에 가 봤니?” 그래, 올 것이 왔구나.

최애 , 단골 L 커피숍



작년이었던가? 퓰리처상을 받은 예술비평가 제리 살츠가 수상 강연에서 예술가들을 향한 몇 가지 조언(=일침)을 남겼다. 대상은 주로 작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폐업하고 만) 음반사를 운영할 때 ‘음악을 만드는 사람도, 음악을 듣는 사람도 모두 예술가다.’라는 말을 모토로 삼아왔다. 전문대학이지만 디자인과를 졸업했으므로 광범위적인 ‘예술가’에 나도 포함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제리 살츠의 강연 번역문을 블로그들에서 탐독했던 기억이 났다. 여러 이야기 중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가라. 버스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무조건 그곳에 가야 한다. 가서 3일을 그곳에서 보내라. 다른 곳은 필요 없다.”라고.


그래, 가자. 알아보니 무료입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료에 주말이 끼어 그런가, 전 세계가 추석 연휴는 아닐 텐데 사람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머어어어어엉무 많아. 입장료와 오픈 시간만 알아보고 내일 문 열자마자 다시 와야겠다. 두 주먹 불끈, 내일의 전투에 앞서 오늘은 저녁부터 잘 먹고 잘 쉬어줘야지. 


숙소로 돌아가는 길, 비 오던 아침에 스페인 광장을 배회하다 눈에 들어온, 차이나타운을 방불케 하는 중국식당들이 떠올랐다. 스페인 광장까지 다시 내려가기엔 지쳤고, 숙소 바로 근처인 싼토 도밍고(Santo Domingo) 역에 작은 마라탕 집이 있던데 (아시아 슈퍼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유럽에서 신라면 가격이 제일 저렴했다. 0.99유로!). 날도 춥고 으슬으슬하니 국물이 필요할 것 같아. 드디어 마드리드에서 아시아 요릿집에 첫 발을 들여놓는다. 그들도 내가 중국인이 아닌 건 알아본다. 점원은 Hola! 를, 나는 니하오! 를 외치며 인사를 나누고 쓱 보니 한국에서 경험한 마라탕 집들과 시스템이 똑같다. 바구니에 새우, 버섯, 건두부, 넓적 당면, 배추, 무, 청경채, 오리 선지, 유부 볼을 넣고 건넨다. 많이 매우려나? 중국어로 ‘라’가 맵다는 말인 것 같았으니까 “라? 라?”하고 물어봤다(고 생각한다ㅋㅋㅋ). 점원이 응답한다. “스파이시?” 앗싸. 통했어 ㅠㅠ 일단 무조건 질러본다 “이, 이!! (1-2-3은 이얼싼 이니까)” 손가락도 1이라고 맹렬하게 흔들어 보인다. 고른 재료를 전자저울에 올리고 계산을 하는데 3.4유로가 나왔다. “네?” 다시 확인해보니 친절하게 계산기에 찍어서 보여준다. 진짜 3.4유로다. 일단 지불하고 자리로 가 앉았다. 왕 뚝배기에 맑은 국물, 약간 매콤할 듯한 고추기름 아래로 재료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다. 최종 3.4유로가 맞았다. 마드리드 최고의 혜자 음식은 바로 이곳, 남남 마라탕에 있었다.(단골 등재!)

가자! 남남 마라탕으로,



냠냠 후루룹 감동의 눈물 콧물 닦아가며 한 그릇 퍼먹고 얼른 한인 민박으로 달려간다. 오늘 막 입실한 사람, 함께 지냈던 사람들에게 전파를 한다. 최고 맛집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성비 혜자에다가 기본적으로 맛이 있고, 국물이 시급한 사람들에겐 최고의 한 그릇일 테니. 바로 여성 두 분이 관심을 보여 기쁘게 남남 마라탕에 바래다 드리며 내일은 프라도 미술관에 가리라 이야기를 했다. 그들도 바로 오늘 다녀왔는데 차라리 밥 먹고 한시쯤 가라고 귀띔해 준다. 미술관 개장 30분 전에 갔는데, 티켓 사는데 한 시간 기다리고, 입장하려고 또 한 시간 줄 서야 했다고. 1시쯤 퇴장할 때 되니 미술관이 너무 한산하고, 입장도 바로 하는 걸 보며 약이 올랐다고. 나는 그녀들에게 가성비 혜자 뜨끈한 마라탕의 정보를, 그녀들은 내게 프라도 미술관의 수월한 관람 시간대를 알려주었다. 꽃 피는 정보의 실시간 교환, 이래서 한인 민박을 찾게 되나 보다.


내일 점심, 기다려 프라도 미술관!


BGM ㅣ Swan Dive - Safe and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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