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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Nov 25. 2019

무엇을 하건 디자이너답게

잊었던 내 삶의 모토를 찾아서 -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3일에 한 번은 꼭 브런치 업데이트를 하겠노라 선언한 일이 무색하게 바로 다음 날, 미쇼 씨의 스마트폰이 수장되고 말았다. 귀국을 3주 정도 남겨 둔 시점이었다. (이제 일주일 뒤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모든 글감과 사진, 동영상 자료는 물론이고 순간순간 저장해둔 메모들도 안녕-, 그래도 업데이트를 멈출 순 없기에 새로 입주한 숙소의 공용 공간 컴퓨터를 이용 해 글로 풀어보고자 한다. 혹시라도 한국에 돌아가 자료들을 살려낸다면 (여러분, 기도해주세욧!!!) 다시 첨부하기로 하고 말라가의 이야기들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떻게 예술가로 남아있냐는 것이다.

- 파블로 피카소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특히 미쇼 씨가 애정하는 지역이다. -비 내리는 날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사계절 온화한 공기와 바람, 눈부신 햇살로 따뜻한 날이 더 많은 곳! 맛 좋은 올리브와 토마토, 해산물이 풍부한 곳!! 호탕한 사람들, 한 많은 플라멩코와 투우사들의 맵시도 느낄 수 있는 곳!! 바로 ‘안달루시아’다. 그리고 안달루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말라가’. 기원전 고대부터 존재한 해변 도시답게 여러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곳. 내국인들과 유럽인들의 오랜 휴양지이자 전 세계 배낭여행자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곳. 마흔의 정리여행-마드리드림-을 꿈꾸는 미쇼 씨가 문지방을 넘어설 수 있게 용기를 준 ‘피카소’의 고향, 바로 말라가다.


말라가에는 피카소 미술관과 피카소의 생가가 각각 존재한다. 생가에는 미술교사였던 피카소의 아버지가 그린 작품들도 만나 볼 수 있다고 했다. 미술관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성지순례적 기운이 넘치는 곳이라 이번 말라가행에서 피카소의 생가 방문은 건너뛰기로 했다. 그런 자그마한 아쉬움이라도 남겨야 다시 말라가에 올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만큼 말라가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나 보다.


피카소 미술관은 말라가의 센트로(Centro) 즉, 중심가에 위치해있다. 앞선 ‘말라가 추로스 대전’에서 언급한 주요 추레리아들과 가깝다는 말씀!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는 1석 2조의 효과. 그뿐이냐 말라가 대성당, 옛 로마시대 유적지, 알카사바, 말라가 대학과도 멀지 않다. 대학 아래 해변 쪽으로 조성된 큰 공원길을 걷다 보면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내부 무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도 찾을 수 있고, 그 유명한 해변 ‘말라게타(Malagueta)’까지 산책하듯 쉽게 걸어갈 수 있다.




숙소를 나와 바다로 곧장 흐르는 과달메디나(Guadalmedina)강을 건넌다. 근데 저쪽 멀리 하늘에서 갈매기 몇 마리가 생선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중 두 녀석은 정말 바다에 피를 흩뿌리며 집요하게 싸우고 있었다. ‘어머 무서워라’ 생각하는 찰나, 쏜살같은 속도로 승부에 진 갈매기가 가슴팍을 부리에 뜯겨 새빨개진 채 내 발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즉시 사망. “끄우캬우워어어어햑~!!” 괴성을 지르며 눈을 가리고 순간적으로 크나큰 갈매기를 밟지 않으려고 껑충껑충거렸다. 내 앞에 마주 오던 아주머니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에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 숨을 고르고 갈매기의 명복을 아주 잠깐 빌었다. 오늘은 운수가 사나운 날인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우중충한 건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눈 앞에 나타난 말라가 대성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부디 이번 여정,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마치고 마드리드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ㅠㅠ”. 이토록 간절한 마음이 든 게 너무 오랜만이라 입장료까지 내고 본당으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목격한 장면이 그렇게 흉측한 일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기도했다. 대성당을 나와 큰 광장에서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는 골목을 진입하려는데 이번엔 비둘기 떼가 나를 반겼다. 마주오는 백발의 부부 관광객 3쌍과 나 사이의 비둘기 떼. 불안함이 엄습한 가운데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데 그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한 마리가 푸드덕거리자 나머지 비둘기 떼가 나를 향해 낮게 돌진했다. 다시 한번 단전에서부터 깊게 퍼올린 “엄마우아씨아크꺄아~!!!”를 외치며 두 손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주저앉았다 일어났다 파닥파닥 난리를 쳤다. 나이 마흔에 이게 뭐하는 짓이니. 눙물이 앞을 가려 그렁그렁 해진다. 근데 바로 그때 백발의 노인 부부 3쌍이 나를 보고 빵 터진 거다. 특히 아인슈타인 같은 할아버지 한 분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화통하게 웃으셨다. 할머니들은 아마도 내가 괜찮은지 염려의 말을 건네시는 것 같았는데 알아들을 순 없지만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할아버지는 나를 토닥이며 다시 한번 대폭소 시전. 그래, 어린 날의 피카소도 내가 걸어온 이 거리와 골목들을 걷고, 바다를 바라보고, 갈매기들과 비둘기들을 보았을 터. 아침부터 노인 3쌍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어 그분들의 엔돌핀을 활성화시키고 생명연장에 기여를 했다면 좋은 거겠지.




머쓱하게 머리를 털어내며 비둘기들을 피해 작은 골목을 이렇게 저렇게 해쳐 나오니 드디어 피카소 미술관 앞이다. 작고 정갈하지만 완전 새빨강의 시그니처 로고타입이 또 한 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사용하는 명함 디자인에도 피카소 미술관의 로고가 작게나마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건물을 올려다보니 하늘과 잘 닿아있었다. 높이의 표현이 아니라 하늘이 이쪽을 향해 잘 열려있는 느낌이랄까? 1500년대에 세워진 말라가 부에나비스타 궁 일부가 지금의 피카소 미술관이었다.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 비하면 안팎으로 육중하고 화려한 느낌은 덜하지만 일단 이 곳도 건축양식으로 보나 역사로 보나 아름다운 장소임에는 틀림없었다. 지중해의 따사로운 태양과 구름이 아마도 착시효과를 불러온 걸 테지. 씩씩하게 티켓을 구매하고 입장하기 전, 마드리드의 미술관들이 그러하였듯 안전요원의 지시로 배낭은 Locker행 결정! 오디오 가이드가 무료 제공된다는 사실이 기뻐 이번에도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든 짐을 보관했다. 어차피 미술관 내부 작품사진은 촬영할 수 없기도 했고. 그리고 또 큰 후회를 했지!!!


일단 오디오 가이드 앞에 서니 전 세계 수많은 언어 가운데 한글만 없었다. 이렇게 앞뒤로 한국사람들이 꽉꽉 차 있는데도! 문체부와 대사관과 문화원이 분발해주면 좋겠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시작 해, 음반사 근무를 통해 일본 아티스트들과 소통하며 실력을 키워 온 일본어가 만만했으므로 찝찝한 마음이지만 청취했다. 설명은 무척 상세했는데 성우가 자꾸 연기를 해대는 통에 작품에 몰입하지 못하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상황. >.< 결국 가이드 없이, 팸플릿도 없이 맨 몸으로 피카소의 그림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2층에는 사조별, 시대별로 작품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앞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고 왔던 루벤스의 ‘세 여신’을 피카소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그림이 인상 깊었다. 그의 마지막 연인이라는 자클린을 그린 그림들, 가족들을 그린 그림들, 일기처럼 그려간 드로잉들과 조각, 도예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치적인 상황으로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던 피카소는 늘 말라가에 자신의 갤러리를 열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와 동일시되는 ‘큐비즘(Cubism, 입체파)’에 대해서도 “말라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큐비즘도 창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그만큼 말라가라는 곳은 그의 세계에선 안식처이자 도피처이자 놀이터였을 것이다. 한국(무려 인천)에서 열렸던 <고향으로부터의 방문> 전시를 통해 피카소의 세계를 만들어 낸 ‘말라가’라는 곳에 대한 작은 호기심도 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그 전시는 이 곳 말라가의 미술관보다 규모가 컸던 것 같다. 물론 규모나 대작의 포함 여부, 유명한 작품이 있느냐 없느냐로 전시가 재미있다 알차다 별로다라고 일방적 평가를 내릴 순 없을 거다. 그래서 나는 건물에 갇힌 피카소의 작품만 감상할 것이 아니라 밖에 있는 그의 작품을, 영감의 원천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말라게타(Malagueta) 해변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프로듀스101에서 한참 유행하던 ‘내 마음속에 저.장.(양 손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네모난 프레임을 만드는 시늉)’을 하며 허공에 대고, 바다에 대고, 나무에 대고, 혼자 쓸쓸히 놓인 벤치에도 대본다. 잠시 후 빗방울이 다시 하나 둘 떨어졌다. 세상의 모든 자외선을 맨얼굴로 빨아들이고 있던 차에 너무나 고맙다고 생각할 즈음 펄럭이는 원피스를 입고 줄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포토존 하나가 모래사장 위에 나타났다. 그 유명한 말라게타 해변에 도착한 것이다.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깔고 파도 가까이 앉아본다. 다들 바닷물 속에 들어가 호이호이 신나게 놀고 있지만 나는 물을 무서워하고 수영을 못하므로 구경만으로도 크게 만족한다. 잠시 눈을 감고 한 호흡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내리쬐는 태양을 살짝 가려주는 비구름 사이로 짭짤한 바다내음이 느껴진다. 나는 왜 이 곳에 왔는가, 나는 무얼 찾아왔는가.


다시 명함이 생각났다. 잠시 꺼내 손에 쥐어본다. 이젠 쓸 수 없는 내가 직접 디자인한 명함. 그때 불현듯 음반사 파스텔 뮤직에서 대표님 두 분과 면담(=면접)할 때가 생각났다. 당시 외주였지만 회사 고정 디자이너가 있었기에 나는 디자이너가 아닌 기획팀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대표님은 ‘디자인 전공자인데, 디자이너로 근무하지 않아도 되겠냐.’라고 물었고 나는 “제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디자이너답게 일하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내 삶의 모토이기도 했다. 진짜 일 하다보니 그렇게 되기도 했고. 여튼 책상에 볼펜을 꼽아도 디자이너답게, 냅킨위에 포크수저를 올려도 디자이너답게, 운영하는 음악 블로그도 디자이너답게(그래서 진짜 그 해 무슨 어워드에서 포털사이트 부문 디자인 블로그 상을 받았다.)를 내 속에서 부르짖었다. 그것은 잊고 있던 내 젊은 날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눈을 떠 보니 내 앞에 열일하는 아프리칸 노동자들이 비치타월을 빌려준다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그래, 다들 열심히도 산다. 그래도 안 사요 아저씨.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들을 야무지게 털어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말라가에서의 모든 경험을 수확할 시간, 마드리드로 돌아가 피카소의 인생 후반부를 관통하는 역작 ‘게르니카’를 조금은 편하게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말라가 버스 터미널 앞에 섰다. 그리고 두 시간 후, 시에라 협곡을 굽이굽이 쳐 올라 산골 성벽의 도시 론다(Ronda) 도착했다. 네, 마드리드가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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