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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17. 2017

규정할 수 없는

아임 낫 데어 [쯔욘의 영화한잔]


밥 딜런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 시절 밥 딜런은 어땠는가?에 대한 질문도 속 시원하게 해소해 주지 못할 것이다. <I`m Not There>라는 이 영화의 제목처럼 영화 속에는 명확히 규정지어질 수 있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제아무리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영화적으로 유려하게 표현해내었다고 한들 그것은 어쨌든 창작자의 시각이 많든 적든 가미되어있다. 그러니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 우선적으로 과연 다른 누군가가 한 명의 타인을 완벽히 분석해 낼 수 있는지부터 의뭉스럽다. 그래서 한 인물에 대한 영화나 소설 등이 각광받을 때에는 그 인물을 얼마나 똑같이 만들어내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느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곤 하지 않았나.


일반적으로 전기영화는 핵포드 감독의 <레이>와 같이 한 인물의 전체의 삶 중에서 중요 지점들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거나 로버드 뷔드로 감독의 <본 투비 블루>, 커티스 핸슨 감독의 <8마일>처럼 인물의 인생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정형화된 방법론에서 탈피한다. 사실 필자는 이 영화를 전기영화로 구분 지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안된다. 7명의 교집합 없어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고 뚜렷한 서사 없이 그들의 단편적인 파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감독 토드 헤인즈는 미국 대중음악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을 표현하는데 있어 현실과 상상 그리고 의심을 뒤섞어 한 명의 인물을 해체해버린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그의 난해하고 모호한 방식이 꽤나 적확하다는 입장이다. 특히나 '밥 딜런'같은 이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아임 낫 데어 (I`m Not There, 2007년 作)'



등장하는 7명의 인물 쥬드 퀸(케이트 블란쳇), 랭보(벤 위쇼), 잭/존(크리스천 베일), 로비(히스 레저), 빌리(리처드 기어), 우디 거스리(마커스 칼 프랭클린)까지를 밥 딜런의 여러 분열된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접근이겠지만 만약 7명을 합친 것이 하나의 밥 딜런인가?라는 역질문을 하다면 필자는 회의적이다. 물론 모두가 밥 딜런과 어떻게든 관련되었다는 것은 맞다. 말하자면 밥 딜런의 수많은 조각 중 단 7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필자의 사견이다. 잠시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그러니까 얕은 범위 내에서) 관련성을 매칭 시켜보겠다.


기차에 뛰어오르는 흑인 소년 우디 거스리는 당연히 밥 딜런이 젊은 시절 숭배했던 가수 우디 거스리에서 착안해오 것이다. 즉 그는 밥 딜런의 근원 혹은 젊은 시절 정도의 스케치일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도 보이고 조사를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랭보는 한때 '뉴욕타임스'에서 밥 딜런과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를 비교 평가하는 기사를 내보낸 데에서 착안해온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원했든 아니든 음유시인이라고 불린 밥 딜런의 한 단면이 보인다. 7명의 인물 중 외관상 가장 밥 딜런과 유사한 사람은 쥬드 퀸일 것이다. 일단 특유의 머리 스타일의 외향적 모습에서부터 그인지 그녀인지부터 명명하기 힘든 모호함까지. 쥬드가 무대에서 야유를 받는 모습도 확실히 밥 딜런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통기타의 포크 송을 선보이던 그가 일렉트로닉 기타를 들고 나왔을 때 팬들의 야유를 받던 그 모습 말이다. 덧붙여 잭이 사라지고 목사 존으로 대중 앞에 돌아온 설정도 기독교에 심취한 밥 딜러의 음악에 가스펠이 합쳐진 것에 대한 메타포일 것이고, 로비의 결혼생활이 베트남전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어 종결과 함께 종결된 점도 의미심장하다. 필자의 빈약한 추론의 몇 배 이상의 상징은 이 영화에 녹아있다. 그를 좀 더 탐닉한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영화가 한층 더 풍성하게 나가 올 것이다.


'규정지어질 수 없는'이라는 모호함은 사실 영화의 타이틀이 등자 하는 순간부터 예견되었다. 나는 그도, 그녀도 아니고 이곳에도, 그곳에도 없다. 여기에 이미 이 영화의 방법론의 지향점이 들어있다. 미국 대중음악 특히 포크음악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그를 늘 따라다닌 단어는 '저항'이었다. 물론 마틴 루서 킹의 그 유명한 '워싱턴 행진'에도 참석하여 노래를 부른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을 저항의 아이콘으로 보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그런 거창한 단어에 신경도 안 쓰고 음악을 했을 것이다. 원래 예술이라는 것이 그렇고 예술가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자신의 사유와 사색이 몸과 정신에 완전히 깃들어서 분출되는 것이 예술이고 그것을 하는 사람이 예술가일 것이다. 그들의 몫은 거기까지다. 그들의 결과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설을 해나가는 것은 비평가들의 몫이고 그들의 결과물을 완전히 향유하고 즐기는 것은 대중들의 몫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미국 사회에 비판을 하는 노래를 만들어야지!'라고 생각을 하고 창작을 했다면 그의 결과물이 이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한때는 저항정신의 상징이었다가 때때로 대중을 배반하는 음악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음유시인 같은 가사를 쓰기도 하며 신출귀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한 남자를 규정짓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서두에 이 영화의 형식이 적확하다고 언급한 것이다. 꼭 들어맞는 핏 감의 옷을 입은 듯.





맥락이 이러하니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내려는 영화도 그의 역사의 실제 적임을 보여주려는 영화도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애정이 관객에게까지 와 닿는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밥 딜런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브레인스토밍 형식으로 흩뿌려 놓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감독 토드 헤인즈의 창의력에 박수를 보낸다. 자료를 취합하여 하나의 인물을 축조한 것이 아닌 하나의 인물을 여러 갈래로 해체한 그의 방법론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명확히 간파한 직조법이다. 원래 인간은 어느 순간, 상황, 어떤 상대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이는 존재이고, 그 수많은 모습들이 모여서 한 명의 '나'를 이루는 존재 아니던가? 그러니 한 인물을 설명하는 데에는 그/그녀와 관련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혹은 그/그녀의 여러 가지 면을 경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영화 속 6명의 배우의 모습 외에도 밥 딜런의 측근들의 인터뷰 장면(예를 들어 줄리안 무어가 존 바에즈를 연기한 설정)을 인서트 해 놓았으니 <아임 낫 데어>는 정확히 한 명의 인물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지 않을까? 아니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결국 어린 우디 거스리와 같이 노년의 빌리도 기차를 타고 떠나간다. 그것이 여전히 규정지을 수 없는 그리고 규정지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밥 딜런과 같이 말이다. 구르는 돌처럼 한 번도 정체된 적이 없고, 세상의 답을 바람 속에서 찾는다는 사람을 그리고 천국의 문에 노크를 해보겠다는 밥 딜런 같은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창의력이 필요하다. 토드 헤인즈처럼.


★★★★ (별 4개)

규정할 수 없는 자를 표현해내는 창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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