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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22. 2017

어쨌든 성장하는 한국 느와르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쯔욘의 영화한잔]

수컷들의 피비린내 나는 활극이라는 단어는 '느와르'라는 장르가 풍기는 선명한 이미지일 것이다. 사실 '느와르'라는 단어는 '검은'이라는 의미를 뜻하는 프랑스어로써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음울하고 어두운 영화를 지칭하는 뜻이다. 따라서 느와르 장르라는 단어와 칼부림, 유혈사태 등을 바로 연결하는 것은 잘못된 일반화이고 같은 맥락으로 '홍콩 느와르'라는 단어도 이물감이 잡히는 단어이다. 즉 조폭, 경찰이 음모로 뒤엉켜 피 칠갑하는 영화여서 느와르 장르로 명명해 준다기보다는 그런 영화들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범죄'는 늘 어두움을 동반하니 범죄 영화의 대부분이 느와르 장르에 속하겠지만 예를 들어 코엔 형제의 <레이디 킬러>,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같은 영화는 범죄를 조직하면서 시작하는 영화임에도 우리는 느와르라 부르지 않는다.

필자가 서두부터 기본적인 용어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은 '한국 느와르'라는 다소 부자연스러움을 뿜어내며 연결된 두 단어를 언급하려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한국 느와르는 홍콩 느와르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영화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조폭과 경찰이 이합집산 교차하는 스토리가 엮여있는 영화들이다. 즉, 대중들이 쉽게 느와르라는 장르로 떠올릴 수 있는 영화들로 국한시킨다는 뜻이다. 이런 가정에 입각하여 근 5년 남짓 동안 기억나는 한국 느와르는 <신세계>, <아수라> 그리고 이 영화 <불한당> 정도이다(물론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다).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는 한국 느와르의 장르적 재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보여준 영화로 당시 꽤 괜찮은 역작으로 평가되었다. 김성수 감독의 <아수라>는 필자의 사견으로는 졸작에 가깝지만, 평단의 평이 갈렸던 어쨌든 문제작이었다. 두 영화의 공통된 점은 아무래도 전체적인 요소들이 홍콩 느와르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인데 대권다툼, 중상모략, 칼 부림, 어긋난 형제애까지의 스토리적인 면들도 그러하거니와 동남아인/조선족들이 해결사들로 등장하는 설정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등의 디테일한 요소들까지 말이다. 홍콩 느와르의 걸작이라 여겨지는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 시리즈만 가지고도 필자는 두 영화(<신세계>, <아수라>)의 레퍼런스를 꽤나 많이 찾을 수 있다. 사실 이것을 단순히 차용했다(좀 더 거칠게 표현하면 베꼈다) 정도의 시각으로 비판한다 해도 전혀 근거 없는 논리는 아니지만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 칸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갔다 온 지금 필자는 이 영화의 퀄리티를 논하기 전에 어쨌든 한국 느와르가 향해가는 방향성만은 옳지 않나?라는 입장을 간추리고 싶어졌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The Merciless, 2016년 作)'



그럼 <불한당>은 독창적이었나? 이 질문에 답을 하는데 필자는 회의적이다. 이 영화의 기본 구성에서 단박에 떠오르는 영화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 유명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작법처럼 <불한당>은 꽤 많은 플래시백으로 영화를 비틀고 또 비튼다. 배신 뒤에 배신이 있고 그 배신 뒤에 또 다른 배신이 있는 불한당들의 모략을 보여주는 데에 사용된 이 공법은 누가 자신을 배신한 자였는지 과거를 뒤쫓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누들스(로버트 드니로)의 발자취와 유사하다. 물론 정말로 변성현 감독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걸작을 레퍼런스로 차용했는지는 의문이지만 굳이 그 방향으로 몰아가 보려고 하니 마약과 소금을 같이 넣어 용해된 뒤 떠오르는 설정도 정확히 어린 누들스와 일당들의 시퀀스와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한 영화가 다른 영화와 꽤 근접하게 닮아 있다면 그것이 오마주나 패러디가 아닌 이상은 분명히 창작자의 기본 윤리를 어기는 일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문뜩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100년이 넘은 영화라는 예술사에 무수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지금도 나오고 있는데) 꼭 비판적인 입장으로 일관해야 할까? 데이빗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는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의 주변 인물들이 한 명씩 떠나가 결국 외로이 혼자 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 속 마크 저커버그의 모습은 <소셜 네트워크>로부터 약 30년 전 영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시리즈에서 배신자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네는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와 비토 꼴레오네(알 파치노)의 모습과 일치한다. 다시 한번 시간을 30년 거슬러 올라가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언급한 이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된 한 남자를 목도하게 된다. 즉 지금 시대에 나오는 영화의 레퍼런스를 찾고자 굳게 마음을 먹는 이가 있다면 그/그녀는 대부분의 영화와 유사한 과거 영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다른 영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점 하나로만 영화를 비판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불한당을 비롯한 한국형 느와르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들이 정말 다른 영화의 것들을 차용하기만 하는 데에 그쳤다면 이 영화들은 오마주, 패러디도 아니기에 분명히 지탄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서는 '최선'이라는 것이 보인다. 한국 느와르의 계보는 한때 충무로를 풍미했던 '조폭 영화' 일 것이다. 시종일관 실소 머금게 하는 유머를 선보이다가 결론은 감동으로 끝나는 류의 영화들 말이다. 단적으로 과거의 선배 격인 영화들과 비교해 본다면 지금의 한국 느와르는 조금이라도 신선함, 차이점을 선사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 '뻔한 한국 영화'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분명히 영화사의 걸작들을 많이 찾아 보았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신만의 방식에 과거 영화로부터의 것들이 묻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느와르는 발전 속도는 더딜지 언정 방향만큼은 올바르다는 입장이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입장을 확신으로 바꿔 놓았다.

<불한당>은 가슴속에 수많은 비수를 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경찰의 수뇌부이든, 조직의 간부급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선/악 구조는 이미 무너져 있는 세상이니 그들이 '상황'이 아닌 '사람'을 믿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무수한 액션 신들 중에서도 적들과의 교전 중 조현수(임시완)의 등 뒤에서 그의 어깨너머로 타자들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쇼트가 눈에 들어온다. 현수는 여러 사람들이 짜놓은 판위에 올려진 장기 짝이다. 그의 시점 쇼트가 아닌 적들과 그를 잠시나마 같이 잡는 쇼트. 감독의 의도였든 아니든 이것이 시점 쇼트라면 과연 그 시점의 주체는 누구일까? 만약 이것이 모든 상황을 설계하고 좌지우지하는 자의 시점이었다면, 이 순간 현수는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게 된다. 천인숙(전혜진)의 말처럼 '지금 세상에서는 결국 당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이기에 이 쇼트는 '잘못을 하지 않고도 잘못한 자가 되어버린 현수의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는 톰 포드 감독의 <녹터널 애니멀스>의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와 묘하게 닮아 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비극에 빠진 이유가 완전히 환경 탓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불한당들의 세상인가? <녹터널 애니멀스>를 보고 머금었던 탄식을 다시 한번 하고 싶다. '정녕 착해 빠진 남자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가?


★★★☆ (별 3개 반)

어쨌든 성장하는 한국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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