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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l 15. 2017

최선이 아닌 차악

꿈의 제인 [쯔욘의 영화한잔]


보라색은 상대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색이다. 그래서일까? 미러볼이 돌며 보랏빛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하면 그곳은 모호하고 몽롱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명도가 낮아지면서 분위기가 더욱 끈적끈적 해지면 마치 환각이 작용하는 공간처럼 현실감을 점점 잃어버리게 된다. 즉, 보랏빛으로 시작하는 <꿈의 제인>은 현실 저 너머를 지향하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현실과 이상을 도치시켜 버리거나. 소현(이민지)이 제인(구교환)과 처음 만나는 순간은(시간순을 배제하고 영화 속에서 제인이 처음 등장해 둘이 만나는 순간을 일컫는다) 자신의 손목을 그은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꿈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미 목까지 차오른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즉, <꿈의 제인>은 꿈과 현실, 진실과 허구의 경계라는 깊은 미로 속에서 방향을 잃고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굳이 구조적으로 나눈다면 제인이 죽는 순간까지가 1부 이자 소현의 꿈이고, 그 이후의 참상이 2부 이자 소현의 현실일 것이다. 그녀가 꿈을 꾸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을 위로해줄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허상의 공간에서는 최소한의 것들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이들이 존재하니까.


그러면 1부에 해당하는 '꿈'의 어느 부분까지가 소현의 창작이고, 어느 지점부터가 현실일까? 필자는 1부의 전체가 소현의 바람 속의 세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잠시 필자는 소현이 꿈을 꾸게 된 원인을 추론해 보겠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전 남자친구 정호(이학주)가 일하는 바(뉴월드)에 자주 찾아갔었고 그러다가 제인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소현은 무대 위에 선 제인이 진심 어린 과거 고백을 한 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되고, 감화를 받게 된다. 왠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 제인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현실의 무력감에서 벗어날 일말의 방법을 찾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제인은 여장을 한 남자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부터 사회통념을 기준으로 본다면 거짓된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역설적으로 거짓일 때가 자연스럽고 행복한 사람이다. 소현이 제인에게 감화를 받은 순간에 혹시 '이 모든 것이 거짓이면 조금이라도 행복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상황적인 측면 이외에 외향적인 면에서도 소현과 제인은 상하 반전이 되어 닮아있다. 제인이 여장 남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소현도 중성적인 이미지가 짙은 소녀이다. 두 여자(?)가 한 명의 남자 정호를 사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읽힌다. 그래서 소현은 자신이 주인공인 꿈을 창조해낸 것이고 그 꿈속에 자신의 이상향 같은 존재에 제인을 끌어들여 '꿈의 제인'을 완성 한 것이리라.


'꿈의 제인(Jane, 2016년 作)'



말하자면 <꿈의 제인>은 현실을 부정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는 소현의 현실인 2부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창백한 질감과 참담한 사건들이 우리가 <꿈의 제인>을 앓게 만드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왠지 소현의 상처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 같다. 필자가 감히 어떻게 그녀를 이해한다는 망언을 할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그녀는 무색무취의 인간이다. 언급했듯 외향적인 면부터 중성적이니 본인만의 색깔이 없다. 말수도 적어 본질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으며 주체성이라는 것도 거의 미미하다. 어떤 면에서는 단순히 살아만 있는 존재로도 보인다. 아마도 소현은 어린 시절부터 더불어 살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사회성이 결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주눅이 들고, 선택을 하지 않아도 외톨이가 된다. 그녀가 속해있는 '패밀리'라는 결손가족의 아이들이 모여있는 집단의 한 명 한 명은 분명히 모두 사연이 있고 상처가 있는 아이들일 것이다. 소현은 아픔이라는 교집합이 있는 이들 속에서도 고립되니 그녀에게는 해방구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겠지. 이미 고립된 곳에서 한 번 더 고립되어 있음에도 늘 무구해 보이는 그녀가 오히려 섬찟하다.


그러니 그녀도 제인과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한 거짓 속에서 살아야만 그나마 고통의 정도가 적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소현의 꿈속의 설정들은 현실을 속이고 있다. 제인이라는 존재 자체는 이미 성별을 속이고 있고, 소현의 잘려나간 발가락은 존재하지 않는데 가려움과 통증이 느껴진다. 휘파람을 잘 분다는 제인은 김빠진 바람만 새어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중성의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녀는 미러볼을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결코 꿈의 상황이 안온하지 않음에도 부자연스러움과 유머가 뒤섞이며 비극 속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존재한다. 그에 비해 2부의 현실은 1부의 퀘스천 마크를 해소해주는 단순한 서사로써 작용하며 리듬감을 잃는 측면이 있다. 물론 소현에게 리듬이라는 것은 꿈속에서만 허용되는 것이었을 테니 당연한 결과일수도 있겠지만 영화 외적인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본다면 제인을 연기한 구교환의 유무의 차이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제인 자체가 비현실을 상징하고 꿈을 형상화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꿈의 제인>은 사회의 이면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자고 제안하는 영화도 아니고, 결손가정의 아이들에 관심을 기울이자고 촉구하는 사회비판적인 영화로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네 세상의 어느 황폐한 지점을 소현의 처연한 내면을 따라가면서 그저 무력하게 비추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전혀 희망적이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먹먹해지기만 한다. 아직 속세를 알기에는 어린 나이에 현실을 부정하고 꿈속에 살고 싶어 하는 또래에 비해 비이상적인 소현의 바램부터가 이미 디스토피아적인 세계 아니겠는가?

꿈속에서는 보았을까? 꿈이니까 만났을까? 소현이 원하는 삶은 단란한 가족과 함께하는 것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꿈은 '어차피 불행한 인생 혼자 살지 말고 다 같이 사는' 정도의 삶이고 '어쩌다 하루 정도 행복한' 삶이다. 최악을 벗어나기 위한 그녀의 선택은 최선이 아닌 차악이다.


★★★☆(별 3개 반)

최악을 벗어나기 위한 소현의 선택은 '최선'이 아닌 '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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