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아이들(2005년 作)
원래 의도가 너무 직설적이면 탈이 나는 법이다. 웃겨보라고 강요받는 개그맨들처럼, 어디 한번 노래해보라고 강요받는 가수들처럼. <We Are The World>로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뭉쳤을 때, 그 노래는 마이클 잭슨, 스티비 원더, 밥 딜런, 레이 찰스의 앨범에 있는 어떤 노래보다도 감흥이 적었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는 이와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 제아무리 명성 있는 감독들이 머리를 맞댄다고 한들(사실 이들 중 몇몇의 명성은 의심스럽다) 주제가 정해진 영화를 만들어 보라고 하면 난관에 봉착할 공산이 높다. 유니세프가 지원하고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호소적 메시지가 꼭 묻어 있어야 하는 영화를 만든다라.. 필자는 영화라는 예술에서 '메시지'라는 것이 꼭 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만약 어쩔 수 없이 존재해야 한다면 자신의 예술적 감흥을 펼치다 보니 메시지가 부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이지, 어떤 담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많은 경우 제약이 되어 자신이 펼쳐내려는 세계에 발목을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7인의 감독들이 5대양 6대 주의 아이들의 비극을 각자의 감성으로 보여준다는 명확한 목적의식 속에서 탄생한 영화이다. 영화가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큰 사유 없이도 쉽게 잡히지만, 각자의 개성은 일부분 거세된 영화들.
그나마 장점이라 하면 그동안 막연했던 각 나라의 위기에 처한 아이들의 현재를 꽤 구체화시켜주었다는 측면일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단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이 때문일까? 7편의 영화 중 몇 편은 사실상 재현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영화도 존재한다. 말하자면 옴니버스 구조의 7개의 단편들은 편차가 들쭉날쭉하다. 필자에게 권한은 없지만 굳이 7개의 영화의 우열을 구분해보겠다.
처음 문을 여는 메디 차레프 감독의 <TANZA>.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다. 어둠 속에서 본인들의 손에 쥔 총만이 빛에 반사될 뿐 아프리카 흑인 소년들은 완전히 암흑에 갇혀 보이지 않는다. 빛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을 맞이하는 세상은 따스할 것 같지만, 그들과 대면하는 것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총을 든 사내들뿐이다. 이미 아이들은 연필보단 총이, 운동화보단 군화가 어울리고 있으니 (나이와 결부된 상황적 관점에서 본다면)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서조차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셈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교실 안에 빛과 어둠이 얼굴에 스며든 탄자의 모습은 이미 그 자체로 명암의 경계선에 놓여 운명에 갇혀버린 소년의 현재에 대한 은유적 묘사로 다가온다. 즉, 흑과 백 어디에서도 일반적 아이들로 존재하지 못하는 그들. 필자에게 <TANZA>는 가장 자신의 세계와 이 영화의 목적의 배합을 적절하게 한 영화로 보인다.
다음으로 범작 수준의 4편.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BLUE GYPSY>, 카티아 런드 감독의 <Bilu e joao>, 조던 스콧, 리들리 스콧 감독의 <JONATHAN>, 스테파노 베네루소 감독의 <CIRO>. 이 네 편은 그나마 감독들의 개성이 돋보이는 영화들인데, 나름 각자의 리듬으로 영화를 끌고 나간다. 물론 정확한 목적의식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에 목적지가 빤히 보이는 전개가 포착되기도 한다. 이 4편의 공통점은(물론 이것은 <TANZA>도 마찬가지) 각 단편에 속해있는 아이들의 행보는 우로보로스와 같다는 점이다. <BLUE GYPSY>에서처럼 영화 자체에서 주인공을 원래 있던 고아원으로 돌려보내거나 혹은 <Bilu e joao>에서처럼 어차피 계속 거리의 쓰레기를 내다 팔 것이라는 비정한 예견을 내비치거나 아니면 <CIRO>에서처럼 공허하게 돌고 있는 놀이기구로 상징화 하는 등. 4편의 단편들은 이들의 비극에 해방구를 제시하지는 않는다(아니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비극의 소용돌이에 음악 등 각자의 방법으로 위무 정도만 해줄 뿐.
영화는 몫은 재연까지라는 듯이. 이제 실천은 너희들의 몫이라는 듯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All The Invisible Children, 2005년 作)'
스파이크 리 감독의 <JESUS CHILDREN OF AMERICA>, 오우삼 감독의 <SONG SONG AND LITTLE CAT>. 이 두 편은 심각하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발악 때문일 것이라고 눈감아주고 싶기까지 하다. 특히 스파이크 리 감독의 작품 같은 경우는 과하게 클리셰가 덧칠되어 있어, 어디서 본듯한 기시감마저 들게 만든다. 필자가 서두에 말한 메시지와 영화 사이의 주객전도가 결과물에 주는 부작용이 바로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담아달라고 했지, 아이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했나? 세상이 손을 대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보여달라고 했지, 왜 영화가 아이들에게 직접 상처를 입히는가?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이 두 감독은 자신들이 잘 하지 못하는 직무를 맡은 것으로까지 보인다.
영화가 메시지를 제발 봐달라고 호소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들여다보겠다. 문득 필자는 각 단편 속 아이들은 그들의 손에 아이답지 않은 것들이 들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TANZA>에는 총이 들려 있기도 하고, <BLUE GYPSY>에는 훔친 돈이 들려있기도 하며, <JESUS CHILDREN OF AMERICA>에는 에이즈 약이 들려 있기도 하다. 나머지 4개의 이야기에도 버려진 쓰레기, 훔친 시계 등 아이들 손에 들려 있기에는 이질적인 어떤 것들이 들려있는데, 말하자면 이들은 몸과 정신을 앞서 상황적으로 어른이 되어 버린 괴이한 존재들이다. 조로증의 아이들. 이런 사회적 돌연변이들이 탄생 배경에도 공통점이 작용한다. 바로 전쟁과 폭력, 가난과 기근을 물려준 지리멸렬한 어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
이들도 시작은 아이들이었다. 영화처럼 필자도 메시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상황을 간략화하면 비정을 겪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같은 횡포를 자행하고, 그로 인해 또다시 유사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탄생한다는 악의 순환고리의 상황. 일견 이것은 <JONATHAN>에서 주인공이 겪는 시간여행의 구조와 동일해 보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조나단이 과거로 돌아가 전쟁을 겪고 돌아오는 듯 보이지만, 반대로 보면 전쟁을 겪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이야기. 타임슬립을 가능케하는 몽환의 숲을 통해 시간을 구부려 원형의 구조로 만들고 그 곡선을 폐곡선으로 닫아 놓는다. 그렇게 비극의 소용돌이는 어디선가 계속 돌고 또 돌고 있다. 필자가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자 이제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히 영화가 보이지 않는 아쉬운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사실까지 간과해버리는 것은 나 자신이 비겁하지 아니한가?
★★★ (별 3개)
보이지 않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