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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Aug 02. 2020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3

빨중탕 삼각지대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2 - 다시 만난 세계>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86



  나의 루틴에 슬리퍼 활동이 추가되었다. 매일 20분씩 천장과 벽을 걸었다. 천장을 걷는 이유는 머리에 피를 공급하기 위함이었고, 벽을 걷는 이유는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가 하체와 복근을 단련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내 나름대로 이러한 이유를 만든 것은 생각보다 슬리퍼를 활용할 곳이 없어서다. 슬리퍼가 발에 삽입되는 현상은 금전적 차원에 이익을 주거나 유명세를 펼치는데 어떠한 효용도 주지 않는다. 상황 자체가 황당무계해서 마치 인생의 전기를 마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 아무런 극적인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걷고 또 걸었다. 어느덧 처음만큼 땀도 나지 않았고 숨소리도 평온해졌다. 20분은 한 시간까지 연장되었다. 샤워 후 거울에 비친 복부에 굴곡이 보이기 시작했고 평소 입던 바지가 허벅지 부위에서 빡빡해져 잘 들어가지 않았다. 밖을 걸어 다니면 괜히 뭇 여성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아침마다 속옷이 종전보다 불룩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좋았다. 마치 <스파이더 맨>의 피터 파커가 슈퍼 거미에게 물렸던 것처럼 나는 슬리퍼에 발을 물린 뒤 각성하고 있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벽에 발을 대었고 잡생각이 가득 차면 천장에 발을 붙이고 한참을 서있었다. 그렇게 벽과의 스킨십에 중독되어 갈 때쯤 문득 원룸이 나를 소화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가야겠다'


 두 가지만 결정하면 된다. 어디를 오를 것인가. 언제 오를 것인가. 첫 시도이니 낮은 곳이 좋을 것 같다. 3층 미만의 상가 건물 정도가 딱이다. 고시촌에 단층 건물은 쌔고 쌨다. 점점 더 빌딩 옥상이 하늘과 가까워지는 시대이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동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곳은 대한민국의 수도에서 '지금'이라는 시점에 가장 늦게 도착하는 도시다. 담배 한 갑에 4천 원이 된지도 어언 5년이 되어가는 시대에 불과 얼마 전까지 담배 한 까치를 2백 원에 파는 구멍가게가 존재하는 곳이었고, 구석구석 잘만 찾으면 단돈 5천 원으로 두 종류의 면과 기본은 하는 수준의 김밥 한 줄을 흡입하며 비치되어 있는 질펀한 성인 만화까지 볼 수 있는 가성비 갑인 식당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시간이 왜곡되는 공간에 어느 재력가가 고층 빌딩을 세울 엄두를 내겠는가. 그러니까 나의 칩거지는 영구적 투자 배제 지역이다. 아. 마. 도


  사실 높이 보다 신경 쓰이는 문제는 cctv다. 요즘은 도처에서 내 모습이 찍히는 시대다. 물론 과연 공적 자원이 이런 누추한 동네의 안전망까지 투입되고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단층 건물에 cctv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후미진 곳에 있어야 한다. 되도록 외측 벽이 평평해야 하고, 만일을 대비해 중간중간 손을 집을 수 있는 창문틀 있으면 금상첨화다. 당연히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음침한 곳이어도 불안하다.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육성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준의 거리는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곳에 입성한지 3년째 되니 웬만한 곳은 훤하다. 이미 한곳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너로 정했다'


  고시원에서 대로변으로 나오면 횡단보도 맞은편으로 빨간 벽돌이 알알이 박혀 완성된 건물이 보인다. 5층짜리 건물인데 이 동네 치고는 고층이고 나란히 있는 다른 건물들에 비해 가로방향으로 넓어서 그런지 압도적인 느낌이 있다. 무엇보다 전면의 빨간 벽돌이 인상적이다. 지을 당시는 세련된 디자인이라는 야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월에 풍파를 맞은 빨간 얼굴은 이상하게 촌티를 팍팍 품어댔다. 차라리 관리가 잘 안되어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회색빛 건물들은 이 동네와 어울리기라도 하지 저 건물은 하여튼 좀 안 좋은 쪽으로 이질적이다. 건물에 인상을 더 예스럽게 하는 건 5층 부위에 네온 사인으로 새겨진 대중탕이라는 글씨 때문이다. 건물 지하 1층에 위치한 24시간 사우나 홍보를 위해 네온 사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을 밝히는데 늘 '중'의 이응 받침은 꺼질락 말락 깜빡이고 있다. 밤에 길을 건너려 저 간판을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깜빡 거리면 오히려 전기세를 더 먹지는 않을까라는 공상에 빠지곤 한다.


 확실히 뭐든 외연이 중요하다. <반지의 제왕> 속 사우론의 눈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대중탕이라는 글씨가 건물의 격을 떨어뜨린다. 1층에는 꽤 힙한 느낌의 카페들도 들어와 있고, 2층에도 그럴듯한 통유리의 피트니스센터가 입점해 있어 이 동네에서 그나마 제일 잘나가는 청춘들의 육체가 시선을 사로 잡음에도 불구하고 저 건물은 정말 구리다. 왜 지하에 위치한 대중탕 홍보를 저 꼭대기에다가 하는 것일까. 분명히 부유한 아버지 믿고 학창 시절 사고만 치다가 어찌어찌 외국물은 먹게 되었는데, 막상 할 줄 아는 것은 없는 건물주 아들놈이 운영하고 있는 대중탕이리라. 빨간 건물의 대중탕이라 하여 나는 홀로 저 건물을 '빨중탕'이라 명명했다.


  내가 선택한 건물은 빨중탕 뒤편에 있는 3층짜리 연한 분홍 빛깔 건물이다. 여성 전용 고시텔. 실제 분홍빛인지, 베이지색 건물인데 앞의 빨중탕의 빛이 스며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 이 건물은 빨중탕과 약 60도 정도의 각도로 비스듬히 위치해 있다. 고시텔 바로 뒷편에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 동산은 빨중탕과 수직 방향으로 있으니 빨중탕, 고시텔, 동산은 10평 남짓한 삼각형 구도의 빈 공간을 만든다. 겉에서 보면 있는지도 잘 모르는 빨중탕과 고시텔 사이의 샛길로 들어가면 그 공간에 도착할 수 있다. 낮에도 옅은 암막이 형성되는 음침한 곳이지만 또 아주 어둡지도 않다. 동산에 솟아 오른 가로등이 저녁만 되면 켜져 있어 밤에도 사방이 보인다. 벽에 붙은 나는 안 보이고 내 눈에 모든 것이 보이는 장소. 그러니까 난 이곳을 이렇게 부른다.


'빨중탕 삼각지대'




4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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