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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Dec 27. 2020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4

나라 잃은 백성처럼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3 - 빨중탕 삼각지대>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88



이 공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막 고시촌에 입성한 직후다. 군 제대 후 모처럼 만의 가족 식사 자리에서 작가가 되겠노라 선언한 나는 아빠 찬스를 사용해 이곳에 원룸을 구하게 되었다.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그동안 블로그에 작성하는 영화 비평글이 네티즌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글쓰기 잠재력에 대한 방증이다' 낭만과 현실과 판타지가 이러 저리 뒤섞인 나의 성토에 부모님은 속아넘어갔다. 아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엄마는 속고 싶어 했고, 아빠는 속고 싶어 하는 엄마의 설득에 속는 척 연기했던 것뿐이다. 독수공방하며 작가에 다다르기 위해 피를 토해보고 싶다는 치기 어린 낭만화.


사실 글쓰기야 공원을 끼고 있고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안온한 우리 집이 더 낫지 않을까. 게다가 제대로 헝그리 정신 코스프레를 할 거였으면 공동 화장실에 쾌쾌한 냄새가 가득한 고시원에 들어갔어야 했다. 나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불편함에 대한 허용 가능 범위를 설정했다. 화장실, 간단한 조리가 가능한 부엌, 빌트인 냉장고, 옷장, 침대, tv, 랩탑을 올려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책상, 환기 가능한 창문까지 겸비된 원룸이 마지노선이었다. 최소한의 안락함은 유지하는 수준에서의 반쪽짜리 헝그리.


5년이 지나면서 허세가 빠질 대로 빠지다 보니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를 하게 된 것일 뿐, 여전히 나는 지금도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은 체 글을 쓴다. 여하튼 당시에는 내심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을 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백면 서생이었던 건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취업 깡패라 불리는 기계과를 포기하고 펜을 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란 남자에게 완전히 취해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문제는 이 나르시시즘은 혼자 느끼고 곱씹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된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 하고 상대의 적절한 리액션을 회신 받을 때에 비로소 완성이 된다.


'물론 그 대상이 이성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결론적으로 초장기의 나는 매주 지인을 초대했다. 온다는 사람 막지 않고, 오지 않겠다는 사람에겐 집요하게 연락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면 몇 년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를 대며 평소 같으면 스쳐갔을 인연들에게까지도 연락을 취했다. 잘 지냈냐는 안부로 시작해 얼큰하게 취하기 시작하면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아우르며 논쟁을 벌였는데 분위기만 보면 거의 나라 잃기 직전의 백성들 같아 보였겠지만 막상 각론을 자세히 들어본다면 알만한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얼마나 피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가득했는지를. 그러나 당시에 나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었다. 물론 무엇에 대한 진짜인지는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말이다.


운 좋게 옆 테이블에 비슷한 연배의 여성 두 명이 앉아있기라도 한 날에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당장이라도 시민 단체를 조직할 것처럼 야심 가득 찬 사내로 변모하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전태일이었고 이한열이었다. 늘 그렇듯 만남의 끝자락에는 작가란, 작가가 되려는 이유, 성공한 작가들과 나와의 연결성 들을 설파했고, 앞에 있던 상대는 혹은 상대들은 대부분 긍정의 제스처를 보내며 파이팅을 외쳤다. 아니...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돌이켜보면 그런 신호를 보내는 상대들만 남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빨중탕 삼각지대'와 조우하게 된 날도 역시 이런 비슷한 분위기였다. 주룩주룩 폭우가 쏟아지던 한여름의 장마철. 초고층 빌딩을 세우기 위해 비행경로를 바꾸는 게 웬 말이냐며 마치 그 빌딩을 짓는 노동자 중 한 명의 밀접한 친인척이라도 되는 양 성토를 하며 우리의 정신세계는 만취 상태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친구는 먼저 고주망태가 되어 택시를 타고 내뺐고, 나는 체 배설을 완료하지 못한 말들을 혼잣말로 곱씹으며 비틀비틀 원룸을 향해 걸었다. 우산은 들었으나 온몸이 다 젖는 기이한 현상 속에서 일순간 속이 역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1차 삼겹살, 2차 조개구이, 3차 마른안주 중 어떤 것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장대비가 눈앞을 가리고 밤이 깊어가도 이 동네에는 사람들이 즐비한다. 각자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피시방, 노래방, 술집 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 독서실 혹은 학원에서 자정까지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거의 둘 중 하나에 소속된 것이 분명한 이들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그들의 눈앞에서 - 특히 공부를 마치고 말짱한 정신으로 나오는 여인들 앞에서 - 내 속에 있는 것을 뱉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은 불가했다. 코어의 힘과 식도 괄약근을 조절해가며 허겁지겁 본능적으로 눈에 들어온 좁은 통로의 안쪽으로 향하자 마침내 은밀한 일을 벌이기에 최적화된 그곳이 나타났다.


'커억 커억'


심하게 뿜어댔다. 게워낸 후 도래하는 상쾌함과 경건함을 느끼며 정신이 맑아지는 역설을 체감한 체 여러 쇼트로 조각난 기억을 부여잡고는 방으로 돌아와 그대로 뻗었다. 아마 평상시였으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나의 일상에 스며들며 전날의 장소를 망각해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늘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에 자리 잡고 있던 체크카드가 사라졌다. 당시에는 핸드폰 결재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도 했고, 발전이 더딘 동네에 살다 보니 이상하게 나 또한 모든 영역에서 과거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비장의 무기인 엄카 한 장이 있었으나 구매 내역이 모친에게로 곧바로 전송되는 그 카드는 나의 생사 여부를 전달하는 역할 외에는 최대한 아껴야 했다.


'잘 해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즉 체크카드가 없으면 해장과 사우나 콤보는 한없이 뒤로 미뤄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대충 모자를 쓰고 서둘러 나왔다. 문자로 확인한 마지막 결재가 어제 3차로 방문했던 포장마차이니 돌아오는 길에 분실한 것이 분명했다. 길을 반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카드가 주머니에서 빠져나갈만한 격한 꿀렁거림은 그 순간밖에는 없었기에 필연적으로 삼각지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전 11시경 마침내 전날의 오열을 잊어버린 맑은 하늘 아래 그곳에 도착했다. 말하자면 나는 빨중탕 삼각지대의 낮과 밤을 모두 목도한 것이다. 어제 흩뿌렸던 나의 흔적은 빗물에 씻겨가 완전히 사라진데 반해 나의 왕건이 보다도 훨씬 가벼운 체크카드는 미동하나 없이 다소곳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살았다' 


해가 쨍해도 그늘이 져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곳이 괜스레 마음에 들었다. 숙취가 만들어낸 센티한 갬성, 한여름에 우연히 만나게 된 시원함이 만들어낸 상쾌함, 카드를 찾았다는 행복감까지. 삼박자는 공간에 신화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기분을 만끽하다 슥 옆을 보니 분홍빛의 여성전용 고시텔 건물의 뒤태가 보였다. 


'어제 내가 내지른 괴성을 듣고 누군가 저기서 쳐다보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여인은 몇 살일까. 성인일까 미성년일까. 미인일까. 몸매는 어땠을까. 편한 옷을 입고 있었겠지. 어쩌면 속옷만 입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속옷 없이 잠옷만 입고 있지는 않았을까. 혼자니까 편하게 그리 입고 있었겠지'


왠지 모르게 건물의 뒤태가 관능적으로 느껴졌고 삼각지대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좁은 통로를 따라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전날의 물기가 야릇하게 흘러나가고 있었다.




5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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