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견뎌내 살아갈 것이다
수술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몸의 변화만큼 마음도 변한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10대 시절 엄마를 아프게 떠나보내고, 거의 20여 년의 애도 기간을 거쳤다. 삶에서 큰 아픔을 먼저, 오랜 기간 겪어 내었기 때문일까. 이번 암 진단과 수술이 무섭거나 아프지 않았다. 다시 무덤덤해졌다. 수술 후 느꼈던 고통과 아픔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무감각해졌다. 내 몸에 남은 절개한 직선의 상처와 실밥 자국, 양쪽 옆구리에 호스가 삽입되어 있던 구멍의 흔적을 천천히 바라본다. 이제는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져 징그럽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가 옅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상처가 아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몸에 난 상처도 반드시 아물어 새살이 돋아난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된다. 지난 20여 년을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냈던 것처럼 지금의 어려움 또한 어떻게든 견뎌내 살아갈 것이다. 나의 애도 기간처럼 20년까지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와 달리 눈으로 보이는 몸의 상처는 약도 바르고, 회복하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계속해서 살펴볼 수 있을 테니까. 마음의 상처도 빠르게 진단하여 수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찢긴 마음을 꿰매고, 새살이 차오르도록 약을 발라 치료할 수 있다면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진단과 치료가 어렵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무섭고 위험하다.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봤다. 세 가지 대사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
“눈이 내린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눈이 내린다. 네가 지쳐 누워있던 숲으로. 네 딸과 내 위로. 산 자와 죽은 자 위로.”
“굴욕스러운 고통 속에 죽지 않겠다. 이것도 전쟁이고 두렵지 않다. 내 싸움의 방식을 보여주겠다.”
“희망이 없는 게 아냐. 비극 속에서도 살아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극 중에서 암에 걸린 마사는 오로지 평안과 생존을 위하며 지내다 보니 책이나 음악, 영화 그 어떤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거나 집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음악보다는 아침의 새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따스한 햇살, 고요히 내리는 눈송이에 위로를 얻는다. 치료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마사의 모습을 보며 나는 현재 치료 과정 안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암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변한 내 몸과 앞으로 변할 내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에게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퇴원할 때 받았던 30일분의 약을 다 먹으면서 퇴원 후 한 달이 지났음을 깨달았다. 복용한 약과 하루 3번 이상의 재활 운동 덕분인지 내 몸이 조금 좋아졌다고 느꼈다. 몸의 변화와 비교하면 마음의 변화는 잘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오랜 기간 마음이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긍정적인 감정을 들이는 노력이 부족해서였을까? 문득 신께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안겨주면서까지 긍정적인 감정을 들이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10년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건강을 되찾으려는 지금의 나는 어떻게 기억될까? 순간순간 드는 생각과 질문들을 흘려보내다가도 다시 붙잡고 싶어진다. 이 순간을 잘 기록해두었다가 시간이 지나 기억한다면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내가 계속 기록을 해왔던 것은 엄마를 기억하고, 엄마를 기억하는 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철저히 몸의 회복에만 신경 쓰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듯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그럴수록 이 마음을 차곡차곡 천천히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여러 번 아픔을 겪고 견디고 이겨내야만 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