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돈 너머의 세상을 배우는 중이다(9-2)
욕심을 버리지 않으려는 게, 내 조용한 반항이다.
세상이 시끄럽게 외칠수록, 나는 더 조용해진다. 누군가는 화려한 성공을 꿈꾸지만,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 시간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있다.
글을 써도 돈이 되지 않고, 배워도 당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손은 멈추지 않는다.
조용히 배우고, 묵묵히 쌓고, 내 속도로 단단해지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반항이다.
한동안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 또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고 싶은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릴 때마다 혼란이 계속되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꿈을 꿔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도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지 않다.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그 모호함 속에서도 나는 조금씩, 나만의 방향을 더듬어 찾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깨닫고 있다.
내가 바라는 건 어떤 직업이나 명함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 그 자체라는 걸.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됐다.
무명작가가 책을 냈다 해도, 수익은 300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 걸.
작은 명예부터 시작해 수많은 곳곳에 나를 알려야 그제야 강연이나 교육 같은 2차 기회가 생긴다는 걸.
일인출판사를 만들고, 나만의 사업을 세우고, 끊임없이 '나'라는 브랜드를 알리는 일도 필요하다.
생계를 이어가려면 관공서나 사설에서 운영하는 복지 프로그램 강의처럼, 쉽지 않은 자리를 두드려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다 보면 돈과 명예는 조금씩 늘지 모르지만, 그 순간 내 시간은 또다시 '일'에 묶이고 내가 지키고 싶은 자유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나를 알린다고 해서 유명해진들, 유명세를 타고 싶은 마음도 없다.
김칫국이지만, 진심이다.
20년 전, 개성이 남다른 자유로운 영혼의 부모님 덕에 뜻밖의 방송에 출연하면서 전국적인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싸이월드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 연예인도 아닌데 팬카페가 생기고, 걸어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뒤편에는 불편한 일들도 많았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홈페이지엔 나를 '과일'에 빗대어 조롱하거나 성적인 비난을 남기는 사람들,
악플을 끊임없이 다는 이들이 있었다.
대학까지 찾아와 나를 찾는 사람도 있었고, 집 앞까지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길을 걷다 "팬이다"라며 다가와 연락처를 요구하고, 주지 않으면 손목을 놓지 않던 사람도 있었다.
가방을 날치기당했던 일도 있다.
2년 뒤, 한 사람이 "찾으러 오라"고 전화를 걸어왔다.
지갑 속 명함을 통해 연락한 것이다.
무서워서 남사친들을 데리고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오랜 시간 버려져 있었다는 흔적만 남은 가방은 흙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순간, 묘하게 '나를 간 보는 시선'까지 느껴졌다.
증거는 없었지만,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그 시절 부모님도, 나도 많은 경험을 했다.
10년이 지난 뒤 택시에서 기사님이 내 목소리를 듣고 "혹시 그 사람 아니냐"라고 묻는 일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은 날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부모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다.
좋은 인연들도 있었지만, 일반인이 겪기 어려움 일들도 많았다.
유명세는 확실히 양면을 가진다.
화려함 뒤엔 불편함과 부담이 뒤따랐다.
사기꾼도, 승승장구한 사람도, 범죄 표적이 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우리 가족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 감사한 인연들도 있었다.
그 시절, 부모님과 나를 통해 정말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더 단단해졌다.
지금은 화려함보다 그 뒤편의 그림자가 더 잘 보인다.
그래서 더 확실히 알게 됐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성공의 모양'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자유의 모양'이라는 걸.
돈을 배우는 이유도 결국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얼굴이 알려진 이들의 삶은 겉으론 빛나 보이지만, 분명한 그림자도 존재한다.
본인은 괜찮아도 가족들은 늘 부담을 함께 짊어진다.
시기와 질투는 어디서나 존재한다.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유명세를 얻는 순간, 자유의 일부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래서 난 그걸 내가 만든 우리 가족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자유롭고,
온전히 우리 가족의 시간을 구속 없이 여유롭게 살아가고 싶다.
그 양면성을 어렴풋이나마 겪어봤기에, 능력자가 되어도(김칫국) 유명세를 탈 기회가 온다 해도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
강연이나 교육에서 시간당 몸값이 올라갈수록 자유는 줄어든다.
그래서 때때로 '포기할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행인 같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능력자이고 싶기도 하다.
잠들어 있을 때도 돈이 들어오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이 요즘은 스스로 봐도 조금 욕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욕심의 바닥을 들여다보면,
'더 많이 갖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내 시간을 지키고 싶다'는 절박함이 더 크다.
그 마음이 최근 들어 더욱 또렷해졌다.
나 역시 20대 때 프리랜서로 강의하며 자유롭게 일했던 경험도 있다.
그 세계가 얼마나 '꿀직업'인지도 안다.
하지만 결국 일의 종류만 다를 뿐, 본질은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일에 묶이고, 자유는 줄어드는 구조.
그래서 선뜻 뛰어들지 못한다.
아는 만큼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요즘 보면 디지털 노마드, 1인 기업가, 작가들이 SNS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강연과 콘텐츠로 돈을 번다.
하지만 인기가 식으면 다시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그걸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역시, 재테크나 주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 아닐까?"
결국 '노력과 시간'을 계속 투입해야 굴러가는, 또 하나의 시스템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1인 브랜드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그들의 꾸준함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묻게 된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가?"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 사이에서 늘 흔들린다.
글을 쓰며 내 생각을 전하지만 결국 그것도 나를 알리기 위한 과정 아닐까?
이건 어떤 형태의 삶일까?
요즘도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하나 확실한 건 있다.
무엇을 하든, 나는 '온전한 자유'를 갖고 싶다.
투자를 하든,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을 만들든, 결국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그 자유는 화려함이 아니라
나의 리듬, 나의 시간, 나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부의 형태다.
아직 아무것도 없고 모호한 생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용기,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는 평온,
시간을 내 뜻대로 쓸 수 있는 자유.
그게 내가 꿈꾸는 부의 모양이다.
나는 노동이 아니라 '구조'를 돈을 벌고 싶고,
표현하며 살고 싶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조용히 곁에서 함께 성장해 주면 좋겠다.
서로에게 잔잔한 시너지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용히 살고 싶은 욕심쟁이의 반항.
내 방식대로, 내 속도로, 나를 지켜내며
언젠가 반드시 그 모양을 현실로 만들어갈 것이다.
조용한 반항은 결국
세상이 아닌 '나'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연습이었다.
세상이 흔들려도 나는 나의 속도로 걸어단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내 부의 모양을 완성해 가며.
지금은 모호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나는 분명 내 길 위를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돈을 떠나 '자유를 기반으로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의 가장 단단한 욕망은 결국
'자유롭게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 단단한 욕심이 오늘도 나를 앞으로 걷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