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2주의 경험은 그 후로도 비슷하게 쭉 이어졌다. 어떤 경우는 일부러 그러는지, 그저 사람이 둔감해서 배려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회의록 적을 때 활용하라며 회의를 녹음하게 시키고는, 옆에서 계속 소란스럽게 해서 녹음파일에 소음만 가득하게 한다던지 말이다.
그중에 제일 고통스러웠던건 업무를 아주 대충 설명해 준 후에 내가 질문하면 다른 화제로 돌리고, 그래서 일단 생각한 대로 업무를 해가면 이게 아니라고 난리를 치고, 그래서 다시 질문하면 답이 없는 이상한 무한 루프를 반복했던 것이었다. 일상 업무가 힘들뿐만 아니라, 업무를 통해 어떤 성장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를 하지 않았으면… 아 나는 그곳에서 1년 가까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남기고 간 전세계적인 피해와 슬픔 뒤로, 그 사람의 얼굴을 안 보며 일 할 수 있었던 것이 내게는 2020년의 가장 큰 축복이었다.
‘차라리 한국에 오지’ 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일단 여기에서 몇 년을 보내 보면 아무리 나고 자란 고향이라고 해도, 다시 가서 적응하는 건 또 다른 이민에 가까웠다. 게다가 여기서 쓰려고 그 비싼 학비를 주고 석사를 했는데, 시작도 제대로 못해보고 가는 건 가장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였다. 무엇보다 30대 중반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다시 취업하기가 어디 쉽더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집으로 돌아가는 건 각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분노쿠폰을 한 다섯 개쯤 채웠을 때, N과 전화로 업무를 하다가 매우 생생하고 우렁찬 욕을 들었다. 그 때 재밌게도 이어폰이 잘 안되어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는데, 집에 있다가 같이 듣게 된 남편이 듣기에도 참아주면 안 되는 수준이었나 보다. 나는 그 통화 이후에 CEO에게 따로 연락해 이 사람과는 더 이상 일을 같이 할 수 없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해버렸다. (피해를 준 사람이 해고가 되는 것이 맞지만, 그 사람은 미국 오피스 헤드였고 그 사람을 자르면 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는 집 밖을 나와 근처 강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왜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정말 어렵게 구한 기회였는데, 하필 딱 이때 이런 사람을 직장에서 마주쳐야 했을까 억울했다. 지금은 답을 알고 있다. 어떤 불행은 그냥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게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반복이 되면 나를 돌아봐야 하지만, 인생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다 같이 일어난다. 단지 둘 중 어느 것을 바라볼 지 내가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은 표면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다음 이직이 괜찮으려면 레퍼런스도 필요하고, 잃으면 안 되는 중요한 네트워크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두번째 풀타임(현재 직장)에 다시 자리를 잡고, 몇 개월 후 여러모로 자리가 잡히면서 나는 그 사람을 차단했다. “그 때 했던 그 일 참 잘했더라” 와 같은 뒤늦은 코멘트를 날리며 개인 번호로 계속 문자가 오는 것도 불편했고, 나와서 다른 정상적인 조직에 있어보니 그 때 받은 대우는 절대 참아서는 안 되는 것을 더더욱 알았기 때문이다. 막상 그 상황에 있으면 ‘다들 이렇게 사나보다’, ‘원래 직장은 괴로운거야’ 라는 자기 위로를 하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다.
내 홈 그라운드가 아닌 곳이라 더 주눅이 들은 것도 있을 것이고, 내가 좀 더 강하게 대응했어야 한다는 피드백도 주변에서 들었다. 그런데 발을 뻗을 수 있는 건 누울 자리가 있고 나서다. 지금은 영주권도 있고, 맘에 안들면 똑같이 대해주고 나와 다른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경력이 쌓였지만, 그 때는 Fresh off the boat(방금 막 이민 온 사람)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질 수 있었다. 적어도 나중에 그 인간 때문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다며, 내 계획이 망가진 것을 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취했던 조용히 떠나오기 전략에 후회가 없다.
그리고 그 경력으로 나는 지금 자리를 잘 잡았고, 과거의 해프닝으로 떠올리며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성공은 인내하는 자의 것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