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에 대해 -1
약간의 안전 불감증은 새로운 곳을 탐험하기에 필요한 고마운 존재다. 예전부터 여행도 탄자니아, 도미니카공화국처럼 다소 독특한 지역을 크게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갔던 걸 보면, 나는 모르는 지역을 위험하다고 구분하지 않고 일단 가보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뉴욕에 살 곳을 알아보다가 할렘 근처에 살아 보기로 했다. 졸업 직후 여름에 아직도 면접을 보러 다니는 중이었고, 집세는 폭등하고 있었다. 돈을 최대한 아껴 쓰기로 결심하고 일단 지역이 어디든 $1000달러짜리 방 한 칸을 구하기로 했다. 2019년의 천 불 짜리 방은 에어컨을 설치할 곳이 없어 창문을 막고 에어컨을 달아 놓은, 통풍과 채광이 전혀 안 되는 2평 정도의 크기였고, 딱 한 블럭만 북쪽으로 가면 할렘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빌딩 3층에 이삿짐을 다 실은 대형 캐리어 두 개를 계단으로 질질 끌어올리고, 땀을 식혔다.
할렘에는 서쪽과 중부, 동쪽 구역이 있는데, 다행히 내가 있던 서쪽은 비교적 양호한 지역이었다. 동쪽은 어쩌다 한번 급하게 하루 숙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해가 떠있는데도 바깥을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다 (마약 한 노숙자 아저씨가 와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감). 서쪽 할렘은 밝을 때 다니면 종로마냥 사람이 북적대는 정도 느낌의 동네였는데, 해가 지면 절대 나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은 곳이었다.
반면 남쪽으로는 Upper West가 있는데 센트럴 파크 바로 옆인 이곳은 안전하고 부유한 동네다. 어느 날 여기 있는 필라테스 클래스를 한번 체험하러 갔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수강생이 백인 할머니들 뿐이라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길 몇 번 건넜다고 눈에 보이는 인종 구성이 너무나 크게 달라지는 것이 처음에는 참 놀라웠다. 아마 한국에서 자랄 때는 우리가 거의 단일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외모로 보이는 차이가 미미해서 크게 느끼지 못한 것도 같다. 그리고 곧 이렇게 가까운 거리 안에 빈부와 인종이 급격히 달라지는 지역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록 하나를 넘어가면 달라지는 인구 구성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할렘의 경우는 원래 19세기에는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이 자리를 잡고 살다가 20세기에 흑인 인구가 남부에서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유색인종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쯤 2차 대전과 대공황이 오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빈곤과 범죄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90년대부터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동네가 조금 개선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발은 적고 낡은 건물이 많다.
또는 할렘의 경우는 아니지만 Redlining같이 특정지역에 사는 사람에게는 대출을 제한하거나 신용을 다르게 평가하는 차별적인 제도로 유색인종이 사는 지역을 선 긋듯이 갈라놓은 과거의 역사도 있다. 이런 제도는 이제 없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오랜 시간 이어진 불평등에서 벗어 나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보았던 미국은 할리우드가 그린 백인 위주의 사회였고, 그래서 흔히 미국을 생각할 때는 그런 영화같이 잘 짜여진 장면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매체에는 드러나지 않는 그늘을 보면서 과연 여기가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는 사회인지, 출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어제 미국 대법원이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 위헌 판결을 내고 오늘 동성커플에게 서비스를 거부한 비즈니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은 다시 또 기울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