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문화에 대한 생각
오래 전에 적어두었던 2018년 여름 인턴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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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말에 윌리엄을 처음 만났다. 그 날은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폭설이 왔는데, JFK 공항에서 나가는 모든 비행기가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내가 타는 항공편만 제대로 운항하는…. 운빨이 끝장나는 날이었지 훗). 당연 인터뷰를 미루겠거니 하고 전날부터 은근 기대를 했는데, 당일 아침이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어 결국 정장을 챙겨 입고 온 몸에 눈보라를 찰싹찰싹 맞으며 면접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가 나왔다. 본인이 Director of Investments라며 간단히 소개를 했다. 회사는 크지 않았지만 무척 원하던 일이라 많이 공부도 하고, 나름 직원도 몇몇 미리 만났는데, 막상 그는 무표정으로 20분도 안되는 듯한 시간동안 대충 인터뷰를 하고는 나를 돌려보냈다. 그 당시의 느낌은 아예 뽑을 생각이 없거나, 아님 멀쩡한 인간이면 그냥 채용하겠다 둘 중의 하나인가 싶었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걸 보니 그래도 멀쩡한 인간처럼 보였나 봄…ㅎㅎ
그렇게 만난 보스 윌리엄은 차가운 첫 인상하고는 다르게 매우 섬세한 데다가, 안 웃긴 농담도 열심히 하고, 말 끝에 헤헷 하고 웃음을 날려주며 마무리를 짓는 매우 소박한 사람이다. 어찌나 아는 게 많은지 “이건 왜 이런 방식으로 하나요?” 하고 질문을 하면 “아 그건 내 경험상.. “으로 거의 모든 답이 될 정도다. 그래도 나보다 나이는 좀 있겠지 하고 위로로 삼았는데 겨우 두 살 밖에 많지 않다는 걸 Pub에 신분증을 펼치다가 알았다. 누구는 고작 인턴인데 누구는 디렉터를 하고 있고 후잉..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윌리엄이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의 리더라면, 제이크는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백인 남성 스탠다드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영화배우 같이 작은 얼굴에 패셔너블한 그는 목소리 크기부터 제스쳐까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친다. 윌리엄의 자리에서 회사를 차렸고, 규모가 좀 더 커지고 나니 자리를 물려주고 지금은 회사 CEO가 되어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가끔 컨퍼런스 콜이 있어서 들어가 본 제이크의 방에는 벽면을 꽉 채우는 휘황찬란한 대형 그림이며 가구들이 있었는데, 그 아래쪽으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아이 둘의 아빠이면서 사업을 하고 있으니, 거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그래도 자리에 앉으면 우리 와이프하고 애들 넘 사랑스럽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팔불출 스타일이다.
어느 날 그와 커피챗 할 기회가 생겨 사업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큰 부동산 회사에 있다가 대기업 안에서의 정치가 싫어서 자연스럽게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맥킨지, 골드만 삭스, 다 좋은 직장이고 프로페셔널리즘을 배울 수 있는 곳이지만, 그 기회를 통해서 언젠가는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좋은 조언을 내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본인도 아직 가끔 떨리고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질 때가 많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 둘을 보고 있으면 서로를 참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둘 중 한 명이 없어도 회사는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성향은 다르지만 일하기 즐거운 회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비슷하다. 누구나 CEO 방 문을 열고 들어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금요일엔 직원들과 다 함께 브런치를 먹으며 일상 소소한 이야기를 한다. 어쩌다 대표 이름 앞으로 회사에 술 선물이 오면, 직접 과일을 사다가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다정다감함도 보여준다 lol. 비교적 고루한 분위기의 대부분의 부동산 파이낸스 업계를 생각해보면 갖기 어려운 일상이다. 이전에는 ‘기업 문화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겼다면, 지금은 ‘결국은 사람이, 그것도 특히 윗 사람이 회사를 만드는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둘은 여름이라 번갈아 가며 휴가를 열심히 가는 바람에 결국 나는 두 명의 보스와 일하는 행운을 누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