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Anne)은 이제 예순 살을 곧 앞둔 우리 회사 마케팅 매니저다. 우리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업무 이상으로 대화하는 친구가 되었다. 가끔 앤이 어깨가 아프다고 할 때면 기차역으로 향하기 전 그의 집으로 향한다. 노트북이 든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수다를 떨며 회사로 함께 출근한다.
곁에서 지내며 더 알게 된 그녀는 1965년 즈음, 강 건너 바로 있는 Wilmette이라는 부유한 동네에서 변호사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 자란 세 자매 집 딸들 중 한 명이다. 그 옛날에 극소수의 엘리트만 가던 켈로그 경영대학을 졸업할 정도로 좋은 집에서 교육도 많이 받은 신여성이시다. 이십 대에는 결혼을 생각했던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이동이 잦은 군인이었기에 그 사람과의 삶을 망설이다가 청혼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싱글여성으로 살며 해외 근무도 하고, 세계여행도 하는 자유로운 인생을 누렸다.
앤은 이제 곧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그대로 몇 년만 더 회사를 다닐지, 아니면 슬슬 풀타임 커리어를 마무리 짓고 동네 대학교에서 반나절 정도 소일거리를 하며 잔잔한 일상을 살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다행히 앤의 세대만 해도 착실히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후대비가 되었고, 그래서 그 고민은 재정적인 부분은 아닌 듯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만 해도 입사하면 사람들이 기본 30년씩 다니고, 근속기간에 맞춰 퇴직연금을 쌓아주는 곳이다. 그렇게 최근에 은퇴하는 베이비 부머 세대들은 그동안 벌었던 월급보다도 많은 연금을 갖고 퇴직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더구나 앤의 경우 돌봐야 할 부모님이나 자녀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은 것만으로도 앞으로 생활은 가능하였다.
그녀가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은 아무래도 사람과의 연결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 같았다. 해가 빨리 지는 가을-겨울 시즌이 오면 앤은 종종 우울함을 호소한다. 동네 밴드에 합류해 오보에 연주도 하고, 매주 수영강습도 다니지만 일상에서 혼자 있을 때의 고립과 불안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했다. 특히 코로나 시기에는 갑자기 분리된 생활에 아무 하고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일부러 길 건너 카페에 가 커피를 주문하며 점원과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사람들의 서로 맞춰 살아가야 하는 어려움을 알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그들의 곁에는 지켜주는 파트너가 있음을 볼 때 마음이 가끔 쓸쓸해진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 살러 오지 않았으면 접점이 없으니 거의 스쳐 지나가기도 힘들었을 앤을 알아가며, 그녀의 생각을 들으며 남 이야기 같지 않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의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언젠가는 나 자신의 상황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훨씬 더 고립된 삶을 사는 이 세대와 나의 60세, 그렇게 살아도 그 앞의 40년이 남아있을 나의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The hundred year life (by Lynda Gratton)라는 책에서는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져서 이제는 불확실성에 적응하는 것("dealing with the uncertainty")이 100년의 인생의 핵심라고 이야기한다. 지난 한 세기의 변화만 생각해 보아도, 두 번의 세계대전, 국가의 통일과 몰락, 핵무기의 개발, 서비스업의 급증 등 너무나 다이내믹했는데, 앞으로의 100년은 더욱더 변화무쌍할 거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사는 동안 이미 보거나 겪은 것도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 아이폰의 등장 등 이미 여러 가지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선진국의 노년은 - 어찌 되었든 안전한 환경에 있고 재정적으로 탄탄하니-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여전히 어디나 존재하는 외로움, 증가하는 재해, 범죄 등은 비슷하다.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공통적인 문제는 존재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마주할 불확실한 것들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계속 오르내리는 세상 일 사이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5분 앞에 일어날 일도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아주 길게 남아있을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생각해 본다.
일단 고독은 흡연 못지않게 해롭다고 하니 잘 맞는 친구가 세네 명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늙더라도 외로워하는 사람에게도 다가갈 정도의 의지는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귀찮을 정도로 에너지가 없지는 않길)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무언가를 계속 창작해 보는 습관도 계속 꼭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전쟁, 바이러스, 기후변화 등 외부 조건은 내가 아무것도 컨트롤할 수 없지만 내 손으로 만드는 창작물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나에게 기쁨을 줄 테니까.
건강도 당연히 기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100세 인생 준비에 필요한 오늘의 해야 할 일들이 보이는구나. 운동하고, 글 쓰고, 사람을 만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겠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