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꾸준히

1편. 대한민국 국토종주 _ Day 1

by 이연미

Day 1. 마포에서 여주 107km


자전거 국토종주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나자 언제 출발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됐다. 근로자의 날(5월 1일)과 석가탄신일(3일), 어린이날(5일)이 연달아 있는 5월 연휴가 가장 적당해 보였다. 날씨도 아직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이고 그렇다고 춥지도 않아서 가져가는 짐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6일을 목표로 잡았지만, 혹시나 일정이 늘어지는 것을 대비해 여유 있게 2017년 4월 29일 토요일을 출발일로 정했다.


사전 준비는 남편이 도맡아 했다. 바퀴에 바람을 넣는 펌프부터 펑크가 날 때를 대비한 펑크 패치와 여분의 타이어 튜브, 안전에 필수품인 전조등과 후미등, 자전거용 공구, 의약품과 에너지 보충제까지. 자전거 옷은 각자 두 벌만 가져가서 매일 저녁 빨아가며 입기로 했고, 평상복 한 벌과 가벼운 바람막이만 최소한으로 챙겼다. 그것마저도 남편이 다 짊어지고 초보자인 나는 내 몸 하나만 건사하기로 했다. 출발 전날 자전거 샵에 가서 자전거 점검까지 받고 나니 모든 준비 완료. 이제 출발이다.


나란히 쉬고 있는 남편과 나의 자전거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한강 자전거길로 들어서자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싶어 살짝 긴장이 됐다. 그래도 한강변의 자전거길은 평소에도 휴일이면 가끔씩 자전거를 탔기에 익숙했다. 무난하게 한강을 달려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왔는데, 난데없이 급경사의 업힐이 하나 나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맞닥뜨린 첫 번째 고비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언덕은 그렇게 가파르지도 길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가 부족했던 걸까, 체감으로는 거의 수직의 벽 앞에 선 것 같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언덕은 평균 경사도 10%, 거리 800m의 ‘후미개 고개’였다. 라이더들에게 악명 높은 곳이다.) 도로 양 옆으로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올라가는(이른바 ‘끌바’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느려도 상관없으니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지만 말자’라는 생각으로 기어를 가장 가볍게 놓고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후미개고개1.jpg STRAVA _후미개 고개 구간 정보


사실 이때는 기어 조작 방법을 익히기 전이었다. 오르막에서는 기어를 한꺼번에 낮추는 것보다 언덕을 오르면서 페달이 무거워지는 타이밍에 한 단계씩 낮추는 것이 요령이다. 지금처럼 처음부터 1단에 놓고 밟으면 그전에 평지를 달려온 속도의 탄력도 다 잃고 오로지 몸뚱이의 힘으로 오르는 것이다. 당연히 속도도 느리고 에너지 소모도 크다.


아무튼 나는 페달을 꾸역꾸역 밟으면서 큰 ‘S’자를 그리며 도로를 가로질러 올라갔다. 언덕을 직선으로 오르는 것보다 수평으로 가로지르면 거리는 더 길어지지만 경사도는 낮아져서 조금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도로의 한쪽 가장자리에 닿을 때마다,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어떤 한 사람과 자꾸 마주쳤다. 언덕을 오르는 내내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내가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속도나 그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속도나 매한가지였던 것. 그 사람도 나도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진작에 언덕을 오른 남편은 남의 속도 모르고 응원을 했다. 힘을 내라는 좋은 뜻이겠지만 어쩐지 빨리 오르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괜스레 부아가 났다. ‘나는 내 속도로 갈 거라고!’ 정상을 올려다보면 볼수록 의지가 뚝뚝 떨어져서 땅만 보고 페달을 밟았다. 천천히, 꾸준히.


1528902939656.jpg '천천히, 꾸준히'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 모습 _ 오천 자전거길 모래재




그 이후로 업힐을 오를 때마다 ‘천천히, 꾸준히’는 나의 모토가 됐다. 왼쪽 페달을 밟으며 ‘천천히’ 오른쪽 페달을 밟으며 ‘꾸준히’. 남들보다 속도는 느리더라도 되도록이면 제자리에 멈추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자기 암시. ‘무정차 무끌바’의 의지 표명.


‘천천히, 꾸준히’의 힘은 놀라웠다. 경사길 초입에서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막막했던 거리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오르다 보면 조금씩 좁혀지더니, 어느새 나의 자전거는 정상에 당도해 있었다. 남보다 뒤처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국토종주를 하는 동안 언덕도 넘고 산도 넘었다.


고지를 점령하고 나면 올라온 거리만큼의 내리막이 펼쳐졌다. 김훈 소설가가 말했듯이,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자전거 여행 1』, p.12)”.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언덕 아래로 내리달릴 때의 쾌감은 지금까지 쏟은 에너지에 대한 보상 같았다.


누구나 살면서 고비를 겪는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닌 것일지라도 내 깜냥에는 버거운 일들. 그럴 때마다 나는 남이 아닌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역경을 헤쳐 나가면 어쩌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고비를 넘어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IMG_20170429_195237_772.jpg Strava _ 마포에서 여주까지 107.1km 라이딩

[자전거 타러 어디까지 가 봤니_ 1편. 대한민국 국토종주]

계속 이어집니다.


자전거 국토종주 7일 일정

1일 차: 마포 - 여주 107km

2일 차: 여주 - 수안보 92.5km

3일 차: 수안보 - 문경 53.9km

4일 차: 문경 - 칠곡군 102.9km

5일 차: 칠곡군 - 남지읍 107km

6일 차: 남지읍 - 부산 99.4km

7일 차: 마포 - 인천 40.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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