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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9. 2020

‘권위주의 사회’
프랑스를 지탱해온 힘, 군국주의


 서점에 갔을 때였다. 필요한 책을 사고 서점을 한 바퀴 둘러보았을 때 발길을 멈춘 곳은 프랑스 역사 코너였다. 눈에 띄는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가장 많이 진열되어 있던 그 책들은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들’에 관한 것이었다. 혁명적 통치자이자 현대 프랑스의 창시자라는 나폴레옹과, 나치 독일에 맞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강한 지도자 샤를 드골이었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표지부터 업적을 기리는 연대표까지 찬양 일색이던 책들을 보며, 프랑스가 이 두 영웅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둘의 공통점은 ‘강한 프랑스를 만든 리더’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혁명 정신을 이어받아 법전을 만들고 세계에 통용시켰으며 유럽에서 한때 가장 강한 제국을 통치했다. 현대 제도를 완성하고 도로망을 정비하고 정교분리를 이룬 그의 혁신적인 모습은 왕조의 무기력과 초기 공화정의 혼란과 극명히 대비되는 ‘영광과 질서와 번영’으로 각인되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드골 역시 망명 정부를 이끌며 독일로부터 파리를 해방시킨 영웅이었고, 대대적인 나치 숙청과 핵무기 개발, 나토 탈퇴 등으로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를 공업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둘의 진짜 공통점은 따로 있었다. 둘 모두 ‘군인 출신’이며 '쿠테타 정권'이었다는 것 그리고 ‘강력한 1인 독재’를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가져온 질서와 번영은 정당한 힘으로 일으킨 것이 아닌 ‘철저하게 무력으로 세운 영광’이었다


1944년 나치 독일로부터 파리를 해방시킨 '영웅 드골 장군'의 샹젤리제 개선 행진
1805년 아우구르부르그 제2사단 전투에서 승리 후 행진하는 '나폴레옹 장군'

 

 나폴레옹은 혁명 후 사회 혼란이 가중되자 경제적 번영을 약속했는데, 그것은 남의 나라를 침탈한 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 냄으로써 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받아낸 4만 프랑과 1억 2천만 프랑의 전쟁 배상금으로 정부 재정을 충당한 것이다. 그가 정복했던 수많은 곳에서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당시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프랑스혁명 정신에 완전히 위배되는 끔찍함 그 자체였다. 
 
 드골이 망명 정부 수장으로 승승장구했던 이유 역시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비시 정부로부터 수복했기 때문인데, 아프리카 영토에서 그가 벌인 전투에 참여한 ‘자유 프랑스군’은 65%가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1940년 대독일전에서는 17000명의 세네갈 병사들이 전사하고 다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자유 프랑스군은 월급 대신 ‘약탈’로 유지되었다드골은 ‘프랑스 해방’이라는 목표를 위해 식민지인들을 군사적으로 착취했던 것이다.
 
 그의 식민지 만행 전력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그의 10년 재임기간 중 4년은 알제리 독립전쟁 기간으로 알제리에서 프랑스군에 의한 무차별적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그가 수장으로 있던 임시 정부 시절에는 베트남을 침략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렇듯 ‘두 프랑스 상징’이 프랑스를 강한 국가로 만든 배경에는 ‘군국주의 원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게 그들은 ‘위대한 프랑스 영웅’이다. 그 모든 반인류 행위들은 오직 하나의 명제 앞에서 정당화를 얻기 때문이다. 바로 ‘위대한 프랑스 건설’이라는 목표다.
 

'외인부대'의 전신인 '프랑스 식민군대'는 1831년에 창설되어 프랑스의 크고 작은 전쟁에 동원되었다. 1940년 레바논에 투입된 프랑스 식민군대 세네갈 병사들(우)
'프랑스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생을 바쳤던 나폴레옹(좌) '위대한 프랑스를 위해' 생을 불태웠던 드골(우)


 그러므로 그들을 기리는 프랑스인들 인식은 프랑스 정신에 어긋난다. 혁명 정신은 ‘모든 불평등을 끊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잔혹한 침탈은 프랑스혁명 이후에 등장했으며 그의 모든 악행은 위대한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배경에는 공화주의자들의 강박적 목표가 있었다. ‘혁명 성과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목표였다. 실제 나폴레옹은 그가 침략한 모든 곳에서 프랑스 혁명 정신과 자유 민주주의를 열심히 전파했었다. 

  
 68혁명 역시 ‘드골주의’라는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를 뿌리 뽑고자 했던 의지였다. "금지된 것을 금지하라"며 프랑스인들은 드골을 끌어내렸고 자유를 쟁취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반대했던 ‘독재자’를 프랑스인들은 찬양하고 그리워한다. 어떤 방식으로 일군 영광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프랑스를 영광스럽게 한 결과’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는 진정한 혁명 정신을 간직한 채 흘러온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프랑스는 굵직한 혁명들을 거치고도 줄곧 우경화에 머물러 있던 사회였다. 제5공화국이 건설된 이래 프랑스가 좌파 정권을 가진 적은 단 2번뿐이며 늘 우파나 중도우파가 집권해왔다. 절대군주를 몰아낸 혁명 정부는 군주제를 능가하는 잔악함으로 살육을 저질렀고, 나폴레옹은 황제통치를 했으며, 공화국 정권들 역시 그들의 유지를 물려받은 정체성으로 일관하였다.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 임시 정부가 되고 그들이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주역들이 되었다. 대표적 우파인 드골은 총 14년을, 시라크는 12년을, 사르코지와 극우 퐁피두가 각각 5년을, 중도우파가 7년을 집권하였다.
 

1944년 '파리 해방'후 샹젤리제 개선 행진중인 드골(좌) 나폴레옹 충성부대 '제국친위대(Garde Impériale)'(우)
1940년 6월 18일 런던 BBC 라디오에서 '항독 독립군 창설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는 '드골 장군'(좌)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야망가이자 학살자 '나폴레옹 장군(우)


 특히 ‘공화주의자의 시대’라 불리던 제3공화국은 1870년부터 1940년까지를 통치했는데, 이때 프랑스 ‘초등교육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들의 교육 개혁 목표는 ‘경제력과 군사적 진보’였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공화주의자들은 ‘학교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상 우파와 좌파가 돌아가며 집권을 했으나, 문학 대가의 배출과 인상파와 명품산업과 영화 발명, 에펠탑 건설과 만국 박람회 등의 업적은 프랑스 문화의 정점을 이루며 ‘벨에포크’라는 말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집권 세력들이 일관되게 프랑스를 이끌 수 있었던 건 목표가 같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적 기준의 세계화’라는 목표다
 
 그렇기에 프랑스 통치세력들은 좌우에 관계없이 하나의 선명한 공통 행적이 있다.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이 그것이다. 이것은 루이 14세부터 제5 공화국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흐름이다. 르네상스의 부와 영광은 식민지 개척으로 시작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위대함 역시 무력침탈과 식민지 착취로 이룬 것이다. 드골과 제3공화국이 이룬 ‘아름다운 시절’ 역시 식민지인들에게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이처럼 그들의 ‘선명한 영광’ 뒤에는 ‘강력한 무력’이 있었다.
 
 프랑스의 군사력 증강은 루이 14세 때 시작되었으며, 강한 군대는 유럽의 왕조 분쟁에서 승리하며 유럽 패권을 차지하게 했다. 약육강식 원리를 뼛속 깊이 체득한 프랑스는 나폴레옹 때 군대 체계를 혁신하며 세계 최강 군대를 만들었고, 혁명을 이끈 공화주의자들은 또 한번 군대를 개혁하며 군사력 강화와 신무기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 힘으로 식민지를 침략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강한 프랑스 건설’은 군사력이라는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힘이 바탕이 된 것이며, 그 배경에는 ‘국가주의’가 있었다
 

루이14세 '군사개혁'으로 유럽 최강군대가 된 프랑스 군대의 1712년 '드냉 전투'(좌) 나폴레옹 '군대혁신'으로 더 강력해진 프랑스 '그랑 아메(위대한 군대)' 1804년(우)
1차대전에 징집되어 '프랑스를 위해' 싸운 세네갈 병사들과 프랑스 장교(좌) 전쟁이 끝나고 갈 곳이 없어진 '식민지 군대'를 흡수하여 '프랑스 해방'에 이용한 드골(우)


 그렇기에 프랑스에게 좌파 우파의 개념은 크게 의미가 없다. ‘카리스마에 기댄 권위’가 ‘민중을 앞세운 권위’로 바뀌었을 뿐, 프랑스의 정권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화국 정신. 그 하나의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혁명 정신은 기꺼이 부정되고 폐기되어왔다. 
 
 프랑스의 권위주의 문화는 ‘하나의 강박적인 생각’으로부터 왔다. ‘프랑스적 기준의 세계화’라는 이성주의 사명. 그러나 그것은 극한의 자기중심성으로 타국과 타인의 존엄을 침해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상대를 지배하기 위해 군사력 행사과 권위를 내세움은 필수였을 것이다. 
 
 프랑스 교육이 억압과 권위로 작동하는 것은 ‘질서와 통제’라는 ‘군국주의 마인드’로부터 온 것은 아닐까. 그것이 프랑스의 자랑스러운 전통, 공화주의 정신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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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군국주의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루이14세, 프랑스 식민제국" http://asq.kr/6tTgMSOk1JfO, <Le Militaire-une histoire francaise프랑스 군국주의 실태와 역사, Claude Serfati 교수 http://asq.kr/s272DFLFw3ErJ, (한국어 번역 http://asq.kr/FNPjRGoLmVi2y), 침략한 나라에 전쟁 배상금 받아낸 나폴레옹 http://asq.kr/go8ZLH38p58, <나폴레옹의 범죄> 클로드 리브, 위키피디아 http://asq.kr/OUrcg9GlazUf, 나폴레옹은 '인종 청소 원조' http://asq.kr/lmHQfehpIEUY, 나폴레옹은 '히틀러, 무솔리니 모델' http://asq.kr/opOcdWjIQ, 프랑스 '그랑 아메' http://asq.kr/OJ6ZtkH4uV8Z, <프랑스식 전쟁술> 알렉시 제니 http://asq.kr/iQXHQtNRrJla, 프랑스 제3공화국 http://asq.kr/3bG0mTYI1Vye, 2차대전 당시 드골이 이끌던 망명정부 '자유 프랑스' http://asq.kr/PwE3Sjca4hCa, 드골의 '식민지 군대' 착취 http://asq.kr/FeZNSsSE2gY1프랑스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 사진 http://asq.kr/Jiq9IWGXDq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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