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듄 연대기』는 이미 전설의 SF 걸작으로 유명했었고 나 또한 그 전설의 작품을 읽어보겠답시고 도서관에 갔던 적이 있다. 듄 전집이 18권 짜리였나, 스물 몇 권 짜리였나. 그 방대한 볼륨에 기가 질렸고 1권 앞부분을 깨작깨작 읽어 보다가 그만 둔 기억이 난다. 내용은 뭐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애초에 내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도 아니었다. 『스타 워즈』 식의 제국과 황제의 음모가 나오는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에, SF적 설정은 고작 '어떤 은하계의 어떤 행성에서' 정도, 우주선도 아광속이나 초광속 항해 기술도 그려지지 않고 그냥 '다른 행성으로 이동했다'로 단촐하게 서술되고, 게다가 1권을 넘지 못한 상황에서는 배경도 지루~한 사막 행성 뿐이었으니. 나로서는 그 전설의 『듄 연대기』에서 SF 설정놀음의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이 지난 이참에 다시 『듄 연대기』를 펼쳐보게 된 건 첫 번째로 드니 빌뇌브의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는 나만의 원칙 때문이고(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안볼 수가 없잖아? 소설 원작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소설을 반드시 읽지 않을 수 없잖아?), 두 번째로 영화에 맞춰서 '신장판'이라고 불리는 여섯 권짜리 전집이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조삼모사적인 무지성 사고 프로세스긴 하지만, 옛날 18권 짜리보다는 여섯 권짜리가 더 부담없이 느껴진 이유였던 것이다.
여섯 권짜리 시리즈를 후딱 읽어보자 하고 첫 권을 열었다. 이북이라 종이책과는 산출 방식이 다를 수 있으나, 앱에 찍힌 첫 번째 권의 쪽수는 대략 1300쪽이었으니. 1권만 좀 두껍고 다음 권부터는 얇다고 하더라도 진짜 멍청하게도 기분내키는 대로 지른 결과로 총 6000여 쪽의 취향 안맞는 읽을거리를 숙제로 받아버린 셈이다.
Dune - Frank Herbert
어쨌든 차근차근 읽어서 'SF의 불멸의 명작이자 SF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듄 연대기』의 첫 번째 책 『듄』을 모두 읽고 결말을 보았다. 이야기 구조 자체는 단순했고, 반전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었다. 예언자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남자아이의 아버지가 정적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아이는 원주민과 살게 된다. 이윽고 그는 전설에 의해 예언된 원주민들의 지도자가 되어 정적을 쳐부수고, 황제도 쳐부수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한다.
이야기 내부에 설명되지 않은 개념이나 떡밥이 많다. 예를 들어서 유전자 조작을 한다는 '베네 게세리트'라는 단체가 어떤 방식으로 유전자 조작을 하는지, 어른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기인 주인공의 여동생이 앞으로 하게 될 역할, 인류가 어떻게 행성들에 퍼져 살게 되었다든가 하는 과거 이야기, 생각하는 기계를 금지했다던 '버틀레리안 지하드'의 설정이라던가. 아마도 거대한 세계관을 구상해 놓고 쓴 것이므로 해결되지 못한 떡밥이 후속편에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듄 연대기』는 어마어마한 세계관이고, 이 정도의 탄탄한 세계관이라면 『스타 워즈』에 환장하는 미국인들이 이 작품 또한 환장하며 보는 게 당연하겠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SF'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내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듄 연대기』의 그 감성은 SF에서 흔한 사이버펑크 식 세계관의 감성과도, 초광속 우주선을 이용해 마음껏 항성계를 넘나드는 스페이스 오페라의 감성과도 좀 다르다. 오히려 제국의 변방에서 제국의 심장부에 반해 반란을 꿈꾸는 주인공을 그린 『얼음과 불의 노래』와 비슷하다. 말하자면 세계관에서의 두 가지 중요한 물질인 '모래'와 '스파이스'를 따서 붙인 '모래와 스파이스의 노래'다.
또 한 가지 떠오른 작품이 있는데, 바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사막이 주가 되는 배경에, 영어 이름을 가진 자가 아랍어 이름을 가진 사람들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제국을 무찌른다. 에이 설마...하며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Dune is just Lawrence of Arabia in space (듄은 단지 우주공간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스'일 뿐)"이라는 레딧 글이 눈에 띈다. 1962년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개봉하고 그 이후에 프랭크 허버트가 듄을 1965년에 출간했는데, 허버트가 쓸 때 듄의 초기 아이디어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매우 비슷해서 좀 더 많은 이야기 층을 추가해 다르게 만들었다고 하는 후일담이 있다.
좀 더 무리수를 써서, 주인공 폴 무앗딥의 생애 자체가 이슬람교의 창조자 무함마드의 생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함마드 또한 메카에서 쫒겨난 후 사막의 민족을 모아 전쟁을 일으켜 메카를 탈환했다. 그 전쟁은 종교적인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받아 '성전'으로 일컬어지며, 무함마드는 예언에 나타난 지도자와 선지자가 되어 새로운 종교와 민족을 탄생시킨다. 주인공 폴 무앗딥의 생애도 그렇다. 주인공은 이미 예언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녔고, 아예 과거의 예언 자체에 그의 예언자와 선지자로서의 위치가 점지되어 있다. 그가 벌이는 전쟁은 '성전'이 되며 승리하든 패배하든 다 미래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좀 더 과감하게 현대사회에 빗대는 무리수적 해석을 해 보자면, 듄의 민족인 프레멘들은 사막의 '석유'인 스파이스를 틀어쥔 이슬람 신정주의 세력이다. 스파이스라는 물질이『듄 연대기』의 세계에서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설정, 어떻게 보면 말도 안되는 설정 같이 보이지만(사막에서 유일하게 생산되는 어떤 농산품이 이 우주 사회에서 유일무이하고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중요한 무역품이라고?), 사막에서 생산되는 '석유'에 현대 사회가 멱살잡혀 있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탁월한 설정같이 느껴진다. 후속 시리즈에서는 어떻게 그려질 지 모르겠지만, 석유를 깔고 앉아 세계사회에 온갖 횡포를 벌이는 이슬람 신정주의 세력을 대입해 앞으로의 프레멘과 무앗딥의 행보를 예측해도 될까?
자꾸 이 소설이 '내 취향에 안 맞음'을 어필했는데, 그렇다고 기대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니다. 1권에서 장대한 대 연대기의 초반부로서 이정도 지루함은 참아볼 만 했고, 드니 빌뇌브의 영화도 기대중이다. 그리고 2권도 재미있는 여러 SF 설정들이 나오며 세계관이 좀 더 풍푸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론 나를 만족시킬 만한 흥미로운 SF 설정들이 안 나오고 단지 사막의 연대기, 모래벌레 쇼만 주구장창 나올 수도 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단지 낙타 쇼일뿐'이라고 비판하는 평론가도 있다매?) 사실 듄 연대기의 최고 걸작은 듄 첫 번째 소설이며, 2~6권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지어 프랭크 허버트 사후에 그의 아들이 이어받아서 쓰고 있는 소설들은 불쏘시개라는 얘기도. 나야 거기까지 읽을 생각은 없지만, 일단 주어진 6권까지의 숙제를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자. 기대감이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