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에서 BMW X7과 벤츠 GLS가 신호등 앞에 늘어선 오후 3시.
그 사이로 볼보 V90이 조용히 지나간다.
고개를 돌려보는 시선들이 있다.
"저 차 뭐지?"
한국 도로에서 왜건을 마주치는 것은 마치 평범한 일상에 등장한 작은 이변 같다.
2023년 기준, 한국 신차 시장의 SUV 점유율은 52%에 달한다.
세단은 점차 자리를 내주고, 경형부터 대형까지 SUV가 거의 모든 세그먼트를 뒤덮은 상황이다(한국자동차산업협회 통계).
현대로부터 기아, 심지어 제네시스까지
SUV를 ‘필수 라인업’으로 두는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SUV가 압도적인 흐름인데도 왜건의 시장 점유율은 1%도 채 안 된다.
그런데도 볼보 V60, 아우디 A4 아반트, 푸조 508 SW 같은 왜건들은 꾸준히 수입되고, 꾸준히 팔린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수입 왜건 판매량은 2,000대 수준으로 전체 시장에서 극소수지만 매년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이 '시대착오적인' 선택을 하는 걸까?
"모든 사람이 SUV를 탈 때, 나만은 다른 걸 탄다."
이것이 왜건 오너들의 첫 번째 심리다.
그들에게 왜건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차별화의 도구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수십 대의 투싼과 쏘렌토 사이에서,
자신의 V60은 마치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처럼 빛난다.
실제로 한 V90 오너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XC90을 보러 갔는데, 전시장에 있던 V90을 보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거다' 싶더라고요. 길에서 마주치는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도 매력적이었고요."
이는 심리학적으로 ‘희소성의 법칙(scarcity effect)’과도 맞닿아 있다.
흔치 않은 것을 소유할 때 가치가 배가된다는 것이다.
왜건은 바로 그 ‘희소성’을 실물로 구현한 셈이다.
왜건을 선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진짜 실용성이다.
SUV가 ‘보이는 실용성’이라면,
왜건은 ‘숨어 있는 실용성’의 챔피언이다.
예를 들어, BMW 3시리즈 투어링 트렁크 용량은 495L~1,500L 확장형이다.
같은 급의 SUV인 X3의 트렁크 용량(550L~1,600L)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낮은 로딩 높이.
실사용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이유다.
해외 자동차 전문 매체 카 앤 드라이버(Car and Driver)에서도
“중량 물품을 옮길 때 왜건은 SUV보다 훨씬 효과적”이라고 평가한다.
골프백, 캠핑 장비, 이사 짐까지 실제로 짐을 자주 싣는 사람일수록
이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크게 체감한다.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는 기분이에요.”
아우디 A6 아반트 오너 김 씨(42)의 말이다.
그는 매년 유럽 출장길에서 렌터카로 경험한 왜건에 매료됐다고 했다.
사실 유럽에서는 왜건이 SUV만큼이나 일반적인 차종이다.
2022년 유럽 승용차 시장에서 왜건(스테이션왜건)은
전체 판매의 약 11%를 차지했다(European Automobile Manufacturers Association, ACEA).
알프스로 겨울 스포츠를 떠나는 가족들,
도심 외곽으로 자전거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차고에는 여전히 왜건이 서 있다.
한국 소비자들이 왜건을 통해
‘유럽적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을 간접적으로 소비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흥미롭게도, 왜건 오너 중 다수가 “과거 SUV 경험자”라는 점도 눈에 띈다.
“쏘렌토를 3년 탔는데, 정말 편하긴 했어요.
하지만 도심에서 매일 몰기엔 너무 크고 무겁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차할 때도 신경 쓰이고요.”
볼보 V60으로 바꾼 박 씨(38)의 고백이다.
SUV가 가진 장점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매일의 운전 경험’에서는 왜건이 더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교통안전공단 자료에 따르면 서울 도심 평균 주차 폭은 2.3m 내외다.
차체 폭이 2m를 넘어가는 SUV는 심리적·물리적 부담을 주는 게 사실이다.
반면 왜건은 차체가 낮아 주차와 코너링에서 안정적인 선택이 된다.
왜건을 고르는 사람들에게는 미니멀리즘적 성향이 묻어난다.
화려한 크롬 장식이나 선 굵은 대형 라디에이터 그릴 대신, 절제된 선과 기능적 디자인을 선호한다.
푸조 508 SW 오너의 말처럼,
“SUV는 너무 자기주장이 강해요. 저는 조용히 제 할 일만 하는 차를 원했어요.”
이는 최근 소비 트렌드인 ‘가성비’ 대신 ‘가심비(心)’와도 맞닿아 있다.
필요한 기능은 다 갖추되 불필요한 과장은 덜어낸다.
자동차를 통한 새로운 미니멀리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에서 왜건을 선택한다는 것은 ‘작은 저항’이다.
모두가 “높고 크면 좋다”라고 말할 때 “낮고 길어도 충분하다”라고 답하는 것,
남들이 다 사는 차 대신 나만의 차를 선택하는 것.
이들은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개성과 취향, 그리고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나만의 기준’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는다.
한국 도로에서 왜건은 여전히 소수자다.
하지만 바로 그 소수성 덕분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은 차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건의 탄생: 말 없는 마차에서 시작된 100년
왜건(Wagon)의 역사는 말 그대로 '마차'에서 시작됐다. 1900년대 초, 자동차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기존 마차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왔다.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긴 화물칸이 달린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이 그 시초다.
실용성의 발견 (1920-40년대) 초기 스테이션 왜건은 주로 기차역과 호텔에서 승객과 짐을 나르는 상업용 차량이었다. 목재 프레임에 캔버스 지붕을 씌운 소박한 모습이었지만, 넓은 공간이라는 고유한 장점이 있었다.
가족차의 혁명 (1950-60년대) 2차 대전 후 미국에서 교외 주택 붐이 일어나면서 왜건은 '패밀리카'로 자리잡았다. 시보레 노마드, 포드 컨트리 스쿠이어 같은 모델들이 인기를 끌며, 왜건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됐다. 아이들과 개, 그리고 피크닉 바구니를 싣고 교외로 떠나는 가족의 모습이 왜건과 함께 완성됐다.
유럽의 재해석 (1970-80년대) 석유 파동으로 큰 미국차들이 인기를 잃으면서, 유럽 메이커들이 왜건을 새롭게 해석했다. 볼보 245, BMW 3시리즈 투어링, 아우디 100 아반트 등이 등장하며, 왜건은 '실용적이면서도 세련된' 차종으로 진화했다. 특히 볼보는 안전성까지 강조하며 왜건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현대적 부활 (1990년대-현재) SUV 열풍 속에서도 왜건은 살아남았다. 오히려 '슈팅 브레이크'라는 더 세련된 이름으로 재탄생하며, 포르쉐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 페라리 GTC4루소 같은 고성능 모델까지 등장했다. 이제 왜건은 단순한 실용성을 넘어 라이프스타일과 개성을 표현하는 선택지가 됐다.
결국 왜건은 100년 넘는 시간 동안 '더 많이, 더 편리하게'라는 인간의 욕구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해온 차종이다. SUV가 '높이'로 공간을 확보했다면, 왜건은 '길이'로 답을 찾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