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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Apr 17. 2021

아버지와의 추억 단편

게오르규 <다뉴브 강의 축제>

나의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인생살이에서 실현하지 못한 것을

아들이 이루어주기를 바랐다. 

-게오르규 <다뉴브 강의 축제>




Q. 아버지와의 추억을 써 주세요.

A.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멋진 분이시다.


억지로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셨다. 또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는 두말 않고 묵묵히 수행하셨다. 버겁다고 회피하지도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훗날 내가 당신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신 롤 모델 그 자체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자라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동생들의 매 끼니며 학업 등을 돌보며 챙기셨기에 아버지의 부지런함은 그 차원이 남다르셨다. 워낙에 규칙적인 분이시라 알람시계가 따로 필요 없었다. 일찍 기침하시며 하루를 제일 먼저 여시는 아버지에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한량인 나는 그 때도 지금도 매한가지 답답한 큰아들일 따름이다.  




아버지에게 일이란 본인이 좋다 싫다 라든지, 본인 성격에 맞다 안 맞다 라든지 하며 따져볼 대상이 아니었다. 요새 막말처럼 '됐고,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하는 것과는 상극이셨다. 당신보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먼저 생각하셨다. 지금의 가치관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아버지께선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그리 해라.' 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어거지가 아니시다. 피눈물 흘리며 억울할 일조차 순리라며 따르는 분이셨다.


아버지는 12간지 중 소띠라 그러신 거였을까. 나에게 아버지는 덥든 춥든 한결같이 근면 성실하신 분이셨다. 아버지에게 일이란 당신의 일부였다. 한국인 중에 그렇지 않은 분이 있겠느냐 만은 아버지도 정말 우직하리만치 병가 내는 없이 일을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일만 아시고 가정을 멀리하신 아니었다. 


주말이면 비디오 가게에서 제일 재미난 비디오를 빌려와 자식들과 '같이' 재미나게 즐기셨다. 직접 김치를 담궈 드실 정도로 한식 상차림을 좋아하시지만, 돈까스며 피자도 치킨도 잘 드시는 전천후의 입맛을 가지셨다. 1980년대 마이카 시대에는 주말이 되면 산으로 여행을 가서 소풍, 등산, 캠핑 등을 통해 인생을 재미있게 즐길 줄 아셨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셔서 어디를 가든 늘 사진으로 추억을 남긴 건 행복의 덤이었다.




차를 끌고 멀리 나가는 여행으로만 주말을 특별하게 장식한 건 아니었다. 그 보다도 아버지께서 워낙에 좋아하시기에 거의 주말 루틴으로까지 자리잡았던 게 있었으니 바로 <사우나>였다. 


국민학생이던 당시, 토요일도 평일과 비슷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나갔고, 직장인들은 회사로 출근을 했다. 그래도 평소보단 일찍 끝나서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하여 토요일이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신 잠실역까지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갔다. 영등포구청역에서 잠실역까지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40여분 정도 걸렸는데, 잠실역에 도착하면 롯데백화점 지하매장과 분수대가 연계되어 있어 기분이 들뜨곤 했다. 


아버지께서 은행 건물에서 나오시면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우나로 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사우나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토요일은 으레 동네 목욕탕의 날, 사우나의 날, 찜질방의 날이라 할 정도로 다녔다. 욕탕으로 들어가기 전엔 잊지 않고 종이봉투에 물 한모금을 담아 마시고, 나중에 나올 때와 비교하기 위해 체중계에 올라가 숫자를 확인한다. 이윽고 수증기 자욱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버지께서는 온탕, 열탕, 사우나, 냉탕을 로 다시 냉탕으로 반복해 들어가시며 당신의 몸을 열심히 담금질 하셨다. 당시 내가 보는 아버지의 목욕탕 사랑은 휴식의 공간이라기 보다, 아버지의 건강과 (일하기 위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히 거쳐야 할 훈련소와도 같았다. 


쉼이 아닌 일의 연속이라 느껴진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께서 당최 가만히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탕이나 사우나 실에서 비교적 오랜 시간 계시긴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서도 소처럼 일을 하셨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인 나에게 있다. 기축년 아버지의 쟁기질 대상은 나와 남동생이었다. 


일단 온탕에서 뜨끈하니 있다가 이내 냉탕에서 노는 나와 동생을 불러 때를 밀고, 비누칠을 하고나면, 하늘색 일회용 면도기로 코 아래의 솜털과 이마 위, 눈썹 사이에 난 잔털 등을 깨끗하게 손질해 주셨다. 아버지의 손에 잡혀 있는 매끈매끈 비누칠한 면도기가 내 얼굴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게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능숙하게 면도질을 할 수 있을까.' 목욕탕에 가면 언제나 떠오르는 궁금증 1번이었다. 참고로, 스페인에 사는 지금은 능숙한 면도질 대신 가벼운 가위질로 다듬고만 있다.


그렇게 두 아들의 온 몸을 당신의 두 손으로 열심히 닦아 주시고 나면, 비로소 당신께서도 때를 밀기 시작하셨다. 어쩌면 그리도 때미는 일에 진심이셨을까. 아버지께서는 정말 정성스럽게 미셨다. 하얀 몸을 싯뿔겋게 되도록 빡빡 미셨다. 그게 그렇게나 개운할 수가 없다 하신다. 그러다 때가 되면 아버지께선 등을 맡기셨다.


많은 남자들이 추억하듯 아버지의 등은 내게도 특별했다. 풍채 좋으신 아버지라 등은 네댓 마지기는 되어 보이는 평야이자 운동장이다. 아들은 그 널찍한 논바닥 위에 먼저 물을 뿌린다. 그리고, 녹색 이태리 타올 안에 빨간 욕탕 수건 말아 넣고, 물에 적셔 묵직하게 만든다. 셋팅작업을 끝낸 셈이다. 쟁기질을 하면 자칫 손톱이라고 그을까 하여 비포장길 포장공사하듯 불도저처럼 두 손으로 타올을 꽉 잡고 밀고 나간다. 하얗고 팽팽하던 넓은 운동장은 불도저 타올이 지나갈 때마다 붉게 줄이 그어진다. 그러다 어느새 까끌거리는 천 아래에, 네 식구를 책임지는 아버지의 수고가 굵게 하나, 둘, 묻어 나오기 시작한다. 곧이어 내뱉는 아버지의 한 말씀, "야야, 거긴 좀 더 세게 좀 밀어봐라. 그래 거기, 거기. 어이구 시원타."




그렇게 부자 간의 목욕탕 의식이 끝나고 나면, 근처 할아버지 돈까스 집에도 가고, 영양통닭센터로 가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차 안에서 88대교를 타고 올 때 보는 한강의 야경은 괜시리 더 멋져 보였다. 사우나의 노곤함과 돈까스의 배부름은 좋은 잠을 부르는 약이었다.


늘 잠실역 사우나만 이용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오시는 때면, 동네 근처 목욕탕으로 가 변함없이 루틴을 치루었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변함없이 찾아오는 오토바이 순두부 장수의 딸랑딸랑 종소리를 들으며 순두부와 양념간장을 사 와서 한그릇 뜨끈하게 먹거나, 뱅글뱅글 돌아가며 타닥타닥 익어가던 장작구이 통닭을 사서 맛나게 뜯거나, 아님 수퍼수프림 피자를 라지 한 판으로 시키며 (아쉽게도 피자집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열심히 스티커까지 모았는데...) 욕탕-사우나 셔틀과 때밀이 노동으로 빠진 몸무게를 채워주곤 했다.




국민학교 아들은 어느새 사십대의 가장이 되었고, 사는 곳은 한국을 벗어나 십오년 차 해외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쉬운 게 어디 한 두 개 이겠는가 마는, 그 중에서도 제일 생각나는 건, 아버지와 매주 토요일마다 가졌던 목욕탕 행사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그저 가만히 있다가 갈 공간에서 조차 당신의 몸을 쉼 없이 사용하셨을까.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늘 일, 일, 일하며 두 팔 걷어 부치며 달려들었던 것이 휴식 조차 맘 편히 가져보지 못하게 하신게 아니었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괜히 갖는게 아니다. 아버지의 카톡 프로필 메세지를 보면 이렇게 나와있다.

-가장 하기 힘든 일은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움과 순리를 추구하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상선약수上善若水 가 되신다. 나이 덕에 그나마 쉬시는데도 여전히 일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는 천상 우리 집안을 일구시고 지켜오신 소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 없이 우직하게 나아갔던 불혹不惑의 나이에 팽팽했던 거죽은 이제 뜻대로 행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나이인 종심從心을 넘어서면서부터 조금씩 늘어지고 있다. 넓디 넓었던 등도 제법 수척해지셨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에 비해 젊으신 편이고, 기운이 있으시다.


아버지는 그저 시간의 순리를 따르는 것일 뿐이라며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다 하셨다. 맞다. 원래도 도리에 어긋날 행동을 하신 적이 없는 당신이실진대 나이가 무어라 대수이겠는가. '아들아, 아무 걱정마라, 노 프라블럼' 이라며 전화를 통해 듣는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하시다. '네, 아버지, 그래요.' 멀리 사는 아들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가 충분히 기대고도 남을 등이셨는데, 그 때의 아버지 나이였을 지금의 나는 내 가족에게 어떤 모습일까. 새벽 창가 건너 가로등이 변함없이 자리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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